설교 요약
Aug 29, 2026

하인의 병을 고친 백부장의 믿음
(마태복음 8:5-13)
주원영담임목사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시대를 3포시대(직장포기. 결혼포기. 자녀포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또 다시 3무시대(무관심. 무책임. 무감동)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특히 지금을 3무시대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된 일 말고는 관심가질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고, 감동받을 일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무감동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안 가져 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견딥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누군가에게 책임져 달라고 요청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시간 속에서 감동받을 일이 없어서 무료하고 권태로운 시간을 지내야 한다면, 그 삶은 무척 힘든 삶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인들이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그분께서 계속해서 감동 받을 일을 준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이 바로 그런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백부장에게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무슨 일로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감동을 먹으신 믿음은 ◉자신보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려고, 축복의 통로인 이웃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축복의 통로인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된 관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넘어서야 우리 눈에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웃들을 향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기에 이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소개된 백부장이 자신을 넘어선 그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하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종(노예)을 걱정하고 있습니다(마 8:5-6). 간구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자신의 하인이 중풍병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주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백부장의 이 모습이 우리 주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만 맞추고 살아가면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넘어서서 고통받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돌아보고 섬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건강한 신앙인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감동을 먹으신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마침내 백부장에게 감동을 받으시고 고쳐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마 8:7). 그런데 백부장이 또 한번 주님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자신이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 장소와 하인이 병들어 누워있는 집이 공간적인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에는 시간과 공간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에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했던 것은, “말씀”과 “기도”였습니다. 백부장은 말씀과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께 구하고 기도하면, 그분은 어디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능력의 주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감동을 먹으신 믿음은 ◉보이는 조건들을 생각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은 로마 군대에 소속된 로마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을 깨트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로마의 장교이었기에 이런 결단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분보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하인이 치료함을 받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에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성도 여러분. 저와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지만 예수를 믿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은, 이 백부장의 믿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들인 우리들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믿음을 보여주었기에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을 생각하지 않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헌신하기로 결심한 믿음의 수고가 있었기에,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기에, 우리가 여기에 앉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8절의 말씀과 같이 예루살렘인 이곳에서부터 땅 끝까지, 백부장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 믿음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이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가진 것을 드리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족한 종이 백부장과 같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이 교회에 넘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믿음을 가진 성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성도. ◉보이는 조건들을 생각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이 교회에 차고 넘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이 교회에 그리고 성도님들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Aug 22, 2026

두 렙돈의 헌신을 드린 여인
(마가복음 12:41-44)
주원영담임목사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12:42절과 44절은 이 여인을 “가난한 과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막 12:42).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4). 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녀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무명의 가난한 여인이 예수님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억하시는 여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주목하시는 순간, 이 여인은 더 이상 무명의 여인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께서 주목하시는 인생이 받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개인적 고난도 특별한 상급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막 12:43-44).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을 세상적으로 보면 상처투성이의 여인이었습니다. 가난은 어느 시대에나 저주스러운 모습이지만, 가난이라는 삶과 함께 과부라는 모습은 이 여인에게서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아마도 이 여인은 당시의 사회에서 마지막 희망조차 착취당하고 살아갔던 여인처럼 보여집니다. 본문 바로 앞에 기록된 내용을 보니 이런 사람들이 재산을 착취당하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막 12: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리는 이 여인의 헌신이 주님의 마음을 눈물겹게 감동시켰습니다. 이 여인의 헌신을 주님께서는 아주 특별하게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의 핸디캡이 오히려 이 여인이 인정받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습 속에서 과거라는 상처 때문에 좌절에 매여있을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고, 작은 것일지라도 아직도 우리에게 남은 것을 가지고 주께 나아올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상처입은 모습까지도 주목하시고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지난날의 모든 상처는 빛나는 미래의 상급이 될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도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예배드림과 헌금드림과 섬김의 모습은, 결코 특별할 것이 이닌 일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우리를 올바른 신앙인으로 만들어 가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된 그날도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는 수많은 예배자들이 헌금을 드리고 있었습니다(막 12:41-42).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주님의 시선이 가난한 한 과부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였다고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44절 말씀을 볼 때 이 여인은 생활비를 다 드렸던 것 같습니다. 눈물겨운 고난의 삶을 살아온 여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면서 주님을 섬기고자 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여인이 헌금을 드리는 행위는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특별한 기회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는 것은, “내가 지난 과거에 어떤 상처를 받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주어진 일상에서 어떻게 최선을 다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그날의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그 어느 날 특별한 기회를 선물로 예비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한 헌신이 특별한 사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여인이 드린 특별한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일상이었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 헌신은 특별한 헌신이었습니다(막 12:42-44).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헌신을 요구하는 때가 있습니다. 성공한 모든 신앙의 선진들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적하는 골리앗을 쓰러트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잘할 수 있는 물맷돌 5개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빈들에 나온 어린아이가 자신의 점심 도시락이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나실지 모르는 주님을 위하여 가장 귀하고 값비싼 나드 향유가 들어있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렸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과부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주님께 드린 최선의 헌신을 주님께서는 특별한 헌신으로 기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슴에 담아야 하는 것은, 이런 특별한 헌신들은 세상적인 기준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로는 이런 헌신의 참 의미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과부의 두 렙돈은 당시의 세상적인 가치로 볼 때 의미가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가치가 아닌, 그 적은 돈에 담긴 이 여인의 헌신의 가치를 평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담겨있는 헌신을 주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중에서 조금을 드렸는데,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작지만 우리의 특별한 헌신이 담겨있는 정성을 받으실 때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기뻐하십니다.
작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물질이지만 정성으로 하나님께 드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이웃들은 쉬는 시간이고, 즐기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과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헌신을 받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높여주시고, 특별한 축복의 손을 펼쳐 주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ug 15, 2026

(복이 있는 사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
(마태복음 5:1-12)
주원영담임목사
2007년 4월 19일에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사건은 온 세계를 큰 충격과 슬픔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33명이 죽고 1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망자 중에는 한국 유학생도 2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을 연출한 범인이 한국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지아공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인 23세 청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나, 정작 미국인들은 개인적인 성격장애에서 비롯된 정신병적인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조용히 추모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끔직한 일을 저지른 범인을 정죄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죽음까지 애도하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추모의 글들을 남겼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33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5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인데 어떻게 이처럼 차분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가해자까지를 위하여 추모를 할 수 있었을까요?
이 사건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여덟 번째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이어지는 11-12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1-12).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렇게 설명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저들이 천국에서 받을 상이 큼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번째 복은, 그 동안 말씀드렸던 일곱가지의 복과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그동안의 복들은 자기 자신과 이웃에 관계되는 복이었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과 결단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복은,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받을 때 받게 되는 복입니다.
때문에 이 복은, 복 가운데 최고의 복입니다. 그래서 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몇 가지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를 위하여(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내 자신이 예수의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총독에게 말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했고 자기가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새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요 19:38). 특별히 마가는 이 사실을 더 정확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신을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 15:43). 자신이 예수의 사람이라고 확실히 말합니다. 자신이 예수의 제자인 것을 확실히 드러냈습니다. 이 모습이 최고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핍박이 오더라도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그때는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결단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기독교를 서양귀신이라고 말하면서, 상투를 자른다든지, 양복을 입는 것과 같은 모습은 아주 못된 짓이라고 하여 가문의 호적에서 제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와 같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적으로 바르게 사는 경우 사회적인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경우에,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입니다. 물론 이것을 박해나 핍박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을 통하여 느끼는 것들이 때때로 마음의 가책이 되어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욥이 잔치를 벌인 자녀들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신앙적인 가치관 때문에 받는 고통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당하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방나라에서 생활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뜻을 정하고 살았습니다(단 1:8-9. 3:17-18). 이런 일들은 자기의 신앙적인 가치와 다른 것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핍박이고 고통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갈등과 고통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오는 박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때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하는 사역을 감당할 때에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힘 있는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이 제자들을 붙잡아 협박하고 채찍질하며 말합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행 4:18).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행 5:4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고 항상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롭게 그리고 친절하게 상식과 교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우에는, 박해를 받는 일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거리 한복판에 서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싫다는 사람을 끝까지 붙잡고 집요하게 강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차에 확성기를 달고 운전을 하면서 크게 들리게 합니다. 오로지 전해야 한다는 열정 하나로 상대는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우리 주위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들로 인하여 예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혜롭게 전하는 분들까지 박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오는 박해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이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이 축복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저런 핍박을 받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이겨내신 성도님들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복음을 전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지상명령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다시 한번 오늘의 말씀을 합독하시면서 마음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성도 여러분. 마음을 여시고, 내가 믿는 예수, 나의 주님이시며 살아계신 예수님을 전하십시오. 비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쁜 마음으로 전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을 때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Aug 8, 2026

(복이 있는 사람) 화평하게 하는 사람
(마태복음 5:1-9)
주원영담임목사
살아가시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을 만납니다. 그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지금은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만납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는 누구에겐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불편하게 살아갑니다. 사실에 근거했든지 아니면 오해였든지, 억울한 일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하는 8가지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7번째 복을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9절 말씀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화평하게 하는 사람(εἰρηνοποιοί)”이라는 단어는,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거나 누리거나 유지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2:14-16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단어로 기록하였습니다. 이 향기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은 ◉먼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있는 피조물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성격을 다스리고 많은 교양을 쌓았다고 해도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접하는 방법을 배우고 깨닫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이 계속됩니다.
이런 모습이 있을 때, 자신의 존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고전 15:10).
이처럼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은 ◉자신의 삶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삶에서 평화를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시는 분은 한 사람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하시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날마다 그 은혜 속에서 강건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에 나온지 오래되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이나 구원받았다는 감격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냥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다 보니까, 교회생활이 자연스러워졌고 이런저런 봉사도 하게 되신 성도들도 많다는 말입니다. 또한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은혜를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설명하려고 해도 모르게 때문에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말씀이 곱씹어집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깨달아집니다. 이제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삶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찬 성도의 모습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 화평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나 이외의 모든 것과도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받을 짓을 해야 사랑하지. 존경받을 짓을 해야 존경하지. 사랑하려고 해도 미운 짓만 골라가며 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존경하려고 해도 스스로 멸시받을 짓만 하니 어쩔 수가 없다.” 우리의 이런 생각을 아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6:32-33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 6:32-33)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눈에는, 우리 옆에 있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그의 인격과 삶이 부족하여도, 사랑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성도님들 주위에 있는 분들을 존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만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존귀함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모습들이 나타날 때 우리에게 화평이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됩니다.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 평화를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과도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삶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을 믿고 화평을 만들어 가시는 성도님들 되셔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은혜를 맛보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