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Jun 1, 2025

전폭적으로 믿는 우리의 모습
(요한복음 21:1-9)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일련의 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이, 모두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은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충격을 받게 되면 그 장소에서 떠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합니다.
아마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저 북쪽 갈릴리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떠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훤하게 알고 계시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 그냥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갈릴리로 달려오셨습니다(요 21:4).
본문 4절에 기록된, “날이 새어갈 때”라는 말씀이, 주님께서 밤새도록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달려오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4).
그렇게 밤새 달려오신 예수님께서, 지금 바닷가에 서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계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계셨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5).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파이디온(얘들아).” 이렇게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물고기를 언급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익투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프로스파기온(생명의 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단 한번, 이곳에서 사용하셨던 단어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고기가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엑소(붙잡았느냐. 손에 쥐고 있느냐.)” 손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먼저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막 10:14).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막 10:16). 바로 파이디온이라는 단어 속에는, 주님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 바닷 디베랴 해변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그런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익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프로스파기온”이라는 단어를 쓰신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배고파하는 저들을 보시면서 당신의 몸을 주어서라도 저들의 배고품을 해결하실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다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자식이 잘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부모의 마음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신 이유입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있느냐(엑소)”라고 물으신 이 말 속에는 저들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실패한 저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회복하도록, 기회를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음성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이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없나이다 (요 21:5). 그리고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다시 던집니다.
바로 그때 그 현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요한복음 2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6).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밤새도록 수 없이 많이 던졌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시 던지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물을 다시 던졌더니, 빈 그물을 채워주셨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비로움을 보여주셨습니다(요 21:9). 저들이 배에서 내려 올라와 보니, 숯불이 피어져 있고 생선이 구워져 있고 떡이 있었습니다.
찬 바람을 맞으면서 밤새 애썼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저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채워주신 것입니다. 그물이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추위를 이길수 있도록 숯불을 피워 주셨습니다. 시장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떡과 물고기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시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한마디의 꾸짖음도 없습니다. 한마디의 책망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33년 동안이나 우리와 똑 같은 삶을 사셨기에, 인간의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기에 야단치시거나 정죄하거나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이 마음을 안다고 말하려면 우리에게서 세 가지의 모습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➊주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서 떠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나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내 곁에 계십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➋그분에게 지금 내가 처해있는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것처럼 행세하면서 자기를 변명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아담을 부르시면서, 가인을 부르시면서, 금송아지 사건 앞에서도, 사울 왕이 스스로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임하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변명하는 모습을 싫어하셨습니다.
모세처럼 지팡이밖에 없습니다(출 4:2). 이렇게 솔직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❸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수 없이 던졌던 장소이지만 다시 던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의심하지 않고 다시 던지는 것입니다(눅 5:5-6). 말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전능하신 그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완전히 부셔뜨리셔서 새것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깨어진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다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숯불과 물고기와 떡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 주님을 향하여, 내 삶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맡기시는 그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May 25, 2025

선택이 중요합니다 (빼앗기지 않는 좋은 것을 선택하는 삶)
(누가복음 10:38-42)
주원영담임목사
언젠가부터 “절제”는 영적인 건강에 꼭 필요한 덕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절제를 하지 못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일을 줄이지 못하는 “마르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일행들과 함께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살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자매의 모습이 전혀 달랐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은 같은데, 한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고 한 사람은 전혀 바쁘지 않았다는 이 모습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랑삼아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사는 삶은 결코 잘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나 일에도, 음식처럼 절제할 수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마르다의 바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현대인을 대표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문제가 나타납니다.
◉많은 일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41절).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했던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 벅차게 되니까, 기쁨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인 마리아가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 곁에만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몹시 거슬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바쁘고 분주한 삶은,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가져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특별히 자기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까지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일도 도와주지 않고 있는 마리아를 나무라시거나 도와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고 급기야 예수님을 향하여 불만을 쏟아냅니다(40절).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 아마도 마르다는, 일을 하지 않고 말씀만 듣고 있는 자기 동생 마리아보다 예수님이 더 미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까지 짜증을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집에 식사를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생각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에만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많은 일로 염려하고 걱정하다 보니까, 육신이 피곤해집니다. 육신이 피곤해지니까, 자연히 다른 사람과 충돌하고 하나님과도 충돌하게 됩니다. 가장 사랑하고 이해해야 할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일은 뒷전입니다. 예배드리는 일도, 기도하는 일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도, 어느새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맙니다.
사탄 마귀가 노리는 허점이 결국 이런 모습인데, 때때로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무엇이 우선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라는 것은, 마르다와 같은 복잡한 삶을 선택하지 마시고, 마리아와 같은 더 좋은 선택을 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처방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처방은 ➊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에게서 찾으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그 원인이 나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너무 많은 욕심과 일 때문에, 내가 힘들고 다른 사람도 힘들고 공동체까지도 힘들어하지는 않는지를 생각하며, 남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나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문제는 해결되어질 것입니다.
➋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42절). 너무 바뻐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고 말하고, 기도할 시간이 없고,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고, 봉사하지 못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성도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하고 필요한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한 것처럼,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또 더 성장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신앙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신앙의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해야 합니다. 불요불급한 것이 아니면 과감하게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고 지켜줄 분은, 사랑하는 배우자요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을 가지시고, 신앙의 가지치기를 하시면서 꼭 필요한 일에만 집중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➌좋은 편을 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주님의 뜻은 식사가 아니라 말씀에 있었기에, 마리아는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올바르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해야 합니다. 더 좋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을 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성도님들께서는 정말 좋은 선택을 하신 분들입니다. 이 좋은 선택을 빼앗기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내 마음대로 살게 하려고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만, 유혹에 넘어가서 좋은 선택을 버리고 잘못된 길로 가는 성도들의 삶이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선택하신 좋은 것들을 빼앗기지 마시고 끝까지 간직하심으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May 18, 2025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
(룻기 2:8-13)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 우리의 고민들을 해결해 주기도 하고, 우리의 미래를 성공으로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펼친 룻기서는, “저주받은 곳이라고 불리는 모압이라는 땅에서 태어난 한 여인 룻이, 엘리멜렉이 가장으로 있는 신앙의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성경입니다. 룻은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이라는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고 잘 살게 되었고, 그 계보에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보여지지 않는 성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과 마침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우연과 마침을 가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룻은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엘리멜렉 가문을 다시 세우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통로는, 우리가 아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뜻밖의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룻기는 4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성경이지만, 여러 모습의 축복의 통로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 번째는 밭입니다(룻 2:3). 삶의 현장입니다. 두 번째는 늙은 어머니입니다(룻 1:22). 부모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인 세 번째 축복의 통로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축복의 통로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본문에는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와 사환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밭에서 만나게 되고,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맺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관계을 잘 표현해 주는 대표적인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 만나서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대화”입니다. 우리들의 말이, 또 다른 축복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대화를 나눕니다(룻 2:19).
룻이 자부로서 효성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오미가 자부를 마치 자기의 친딸처럼 대하고 아끼고 있는 모습은 특별합니다. 본받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본받을만한 것은, 이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 보아스에 대하여 나누는 대화의 내용입니다(룻 2:19-20). 좋은 말을 계속 이어갑니다. 축복의 말을 하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보아스는 듣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사람, 바로 보아스를 놓고 이야기하면서 좋은 점만을 말합니다. 뒷담화를 하지 않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나오미와 룻의 대화 내용처럼,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일지라도 축복의 말을 해 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아스와 사환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합니다(룻 2:4).
주인이 자신의 사환들에게 먼저 인사를 합니다. 사환들이나 종들이 먼저 주인에게 인사들 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주인 되시는 보아스가 아랫사람들에게 먼저 겸손하게 인사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환들이 주인 되시는 보아스를 향하여 답을 합니다. 주인과 사환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 자리에 없는 룻에 대하여서도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을 해 주면서 칭찬합니다(룻 2:5-7).
이 모습을 본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있든지 없든지 축복의 말만을 해 주고, 긍정적인 말만을 해 주고, 칭찬의 말만을 해 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아스와 룻이 대화를 나눕니다.
성도 여러분. 보아스와 룻은 처음부터 신분이 다른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룻은 이방인이요, 홀로된 여인입니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보잘것 없는 여인입니다. 보아스의 입장에서 볼 때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을 보아스가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주고 있습니다(룻 2:8). 룻도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룻 2:10). 신앙인인 우리들이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닮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룻기에 등장하는 룻과 나오미, 그리고 사환과 보아스의 대화를 통하여 깨닫는 진리는,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통로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씨앗과도 같습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무의식속에 심겨져서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그 내용과 똑같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특별히 신앙인들의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영향을 미칩니다. 내 입의 말이, 내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내 입을 통하여 전달된 말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을 축복의 통로로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축복의 통로가 되는 말은 어떤 말일까요?
◎은혜로운 말입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함으로 덕을 세우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은혜로운 대화를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신중함이 있는 말입니다. 남의 말을 할 때는 가능한 대로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특히 없는 사람을 놓고 이야기할 때는 더욱 조심함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칭찬해 주는 모습을 늘 잃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함이 보여지는 말입니다. 나와 여러가지 환경이 다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잘것 없는 나를 자녀삼아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늘 낮추고 늘 섬기는 겸손함을 가지고 겸손한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로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도님들의 입에서, 부정적이고, 불평과 원망과 정죄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면, 마태복음 7:3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보실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볼 수만 있다면, 먼저 내 부족함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부족한 점들을 주 앞에 아뢸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축복은 내려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 축복을 확실히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로운 말을 하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중함이 있는 말을 하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함이 보여지는 말을 하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기를 힘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합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May 11, 2025

누구의 아들로 살아야 할까?
(여호수아 19:49-51)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되게 사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뒤로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성도님들께서는 지난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살아오셨습니까? 그렇게 해서 손에 쥐신 것이 무엇입니까? 특별히 자녀들에게 어떤 모습의 부모가 되셨습니까?
오늘 부모를 생각하는 어버이 주일 예배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 갔습니다.
영성학자 “헨리 나우엔”이 어느날 우연히 네델란드의 유명한 화가였던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하여 세 가지 깨달음을 받습니다. 그 깨달음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탕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아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헨리 나우엔은, 세 가지 깨달음 중에서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이 말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세상적인 것들을 다 내려놓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내려놓습니다. 맨몸으로 캐나다에 위치한 “데이 브레이크”라는 장애인공동체로 들어가서 일생을 지냅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에 대하여서도 처음부터 받아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관하여서는 제3의 인물정도로 미루어 두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된다는 것, 아버지의 자리는 내가 돌아가는 것이 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안식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의 핵심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하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는,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아버지가 되고, 어떤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시고 계실까요?
여호수아 19장에는, 여호수아가 땅을 정복한 후에 그 땅을 분배하는 마무리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9장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호칭이 특별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9:49.51). 이 표현은 여호수아서에서 무려 28번이나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한두 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눈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특별합니다. 심지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나는 눈의 아들입니다. 내 아버지는 눈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여호수아의 아버지 눈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아버지를 자신의 이름 앞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찾습니다. 아버지 눈은 세상적으로는 화려하지 못했을지라도, 아들 여호수아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내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은 것입니다.” 이런 무언의 말이 “나는 눈의 아들입니다.” 하는 이 말 속에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수아된 것은 바로 아버지 “눈”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여호수아가 여호수아된 것은 아버지 “눈”때문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이 호세아였습니다. 아버지 눈이 아들의 이름을 호세아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원래 이름이었던 호세아라는 이름을 버리고 여호수아로 불러주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오직 민수기에 한 번만 등장합니다(민 13:8). 모든 경우에 그의 이름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라는 이 이름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까?
마태복음 1:21절 말씀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수아”입니다. 헬라식으로 표현하면 “예수”가 되고, 히브리식으로 표현하면 “여호수아”가 됩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자신의 삶이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뜻을 가진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누구의 아들로 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아들로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몸이지만 결코 요셉의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그의 일생을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호세아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여호수아로 살기를 원했다는 말은, 육신의 아버지 눈의 아들로 살기를 힘쓰는 것과 함께 더 크고 높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로 살기를 힘썼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또 한 분의 아버지가 계셨는데, 바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일생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기를 힘쓴 여호수아에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축복은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딤낫 세라”의 축복입니다.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수 19:50).
“딤낫 세라”라는 곳은 여호수아서에만 등장하는 특이한 지명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볼품이 없는 산지지만, 딤낫 세라라는 이름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열매가 많이 맺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딤낫 세라가 여호수아서에서만 등장하는 이유를 연구하고는 이런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이 땅이 여호수아만의 고유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땅을 분배했지만, 여호수아 외에는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땅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한 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여호수아에게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 많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여호수아에게(수 13:1. 24:29) 넉넉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노후를 기대지 않았습니다. 딤낫 세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호수아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이 외침을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여호수아의 외침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딤낫 세라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묻힙니다(수 24:30).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는 인생의 말년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온 여호수아에게 넉넉하고 여유있는 삶의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습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시기를 힘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