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Mar 23, 2025

하나님의 뜻 ⓶
(데살로니가전서 5:16-19)
주원영담임목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600여 년에 걸쳐서, 40여 명의 저자들을 사용하시고, 10,000Km가 넘는 먼 지역을 함께 하시면서 3개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기록된 방법을 세 가지의 견해로 주장합니다. ◎기계적 영감설과 ◎동력적 영감설과 ◎유기적 영감설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과 성도들은 “유기적 영감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쓴 성경과 베드로가 쓴 성경의 수준이 다르고, 의사 누가가 쓴 성경과 요한 사도가 쓴 성경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들의 표현들이 다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의 모습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종의 모습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사람의 시각에서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4복음서의 주장은 모두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라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각각 다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유기적 영감설”입니다.
이렇게 유기적 영감설로 기록된 데살로니가서이기에 19절 이하의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12절 이하의 모든 말씀이지만 줄이고 줄이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더 요약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님들의 삶의 현장에서 불평하려고 하면 모든 환경이 다 불평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님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감사할 조건들을 찾으시고 감사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그 감사 속에 기적이라는 선물을 넣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분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이렇게 기록하고는 펜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원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시 펜을 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끝내고 펜을 놓았던 바울 사도가 다시 펜을 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을 더 기록한 것입니다. 19-22절 말씀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19-22).
18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더 강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18절 이후에 기록된 내용들이라는 말입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말며. 말고. 버리라.”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고, 자신들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현금이 손에 쥐어진 순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현금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돈 다 가져다 바칠 것이 아니라 일부는 놔두고 바치자.” 이렇게 의논하고는 그 일을 실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했던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행 5:3). 그리고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삽비라도 천연덕스럽게 아나니아와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행 5:9). 그리고 삽비라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 두 단어를 눈여겨 보셔야 합니다. “속인다”는 단어와 “시험한다”는 단어입니다. “분리하다. 나눈다. 떼어놓는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성령과 나를 분리한다는 말입니다. 성령과 나를 떼어놓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3가지 일을 하신다고 요한복음 16: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깨닫게 하시리라) (요 16:8). 그리고 성령께서 이런 일을 하실 때에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양심”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행 23:1). ◎“환경”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욘 1:4). ◎“사람”이라는 도구도 사용하십니다(행 2:37). ◎때로는 미물까지도 사용하십니다(민 22:28).
이처럼 성령께서는 양심을 이용하시기도 하시고, 환경을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사람을 통하여 마음속에 메시지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그 성령을 소멸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2).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함(겉으로만 좋게 꾸미는 것)”과 “쉽게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내 삶에서 보여지면, 내 양심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양심이 점점 굳어져 가면 환경에 대하여서도 둔감해집니다(욘 1:11).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이야기를 해 주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와 같은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와 같은 이런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기도가 없습니다. 감사도 없습니다. 이유는, 성령을 분리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걷어차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멸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소멸하는 자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특별히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모습도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하시고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아시고 순종하면서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r 16, 2025

하나님의 뜻 ⓵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주원영담임목사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로마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1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택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12-16장까지는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신 12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래서 내 생각대로 행동하면, 그 행동은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에 향하여, 오늘도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절 말씀을 보니, 저들에게는 행동하는 믿음이 있었고 땀과 수고와 희생이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 있었고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참고 인내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살전 1:3).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 1:4). 이어지는 5-8절 말씀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데살로니가서를 묵상해 가면, 바울 사도는 저들에게 당부하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더 많이 힘써라(4:1). 그렇게 행하기를 내가 권한다(4:10). 손으로 힘써서 일해라(4:11).
바울 사도는 조금 전까지 할 말이 없고 쓸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렸고 그 뜻대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모범적이고 훌륭한 성도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더 많이 힘써라. 그렇게 행하기를 내가 권한다. 손으로 힘써서 일해라. 무엇인지 모르지만 저들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충고와 권면의 결론을 말합니다. 5:18절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바울 사도가 말한 이것은 5:12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좁히고 좁히면 16-18절에 기록된 말씀일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더 좁혀서 한마디로 말한다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다 중요한 하나님의 뜻들이지만,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있고 내가 누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있어야 하고, 사랑에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소망에는 인내가 있어야 하듯이, 진정한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가는 동안 정말 피하고 싶은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우리 앞에 닥칠지라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사”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라는 문으로 들어와서 원망이라는 문으로 나간다.”
오늘 우리 앞에 어떤 환경이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표현하기만 하면,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시편 50: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기쁘게 받으시고,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펼쳐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영혼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문제들이 회복되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진정한 감사에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감사는 누구를 위하는 것입니까?
감사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감사로 영광을 돌리는 자들의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내 삶의 현장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미국의 26대 대통령이셨던 루우즈벨트 대통령은 나라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험하고 고생스러운 시대에 초라한 경제력을 가졌던 우리 조상들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훨씬 편하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위기는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언제 감사해야 하고 왜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귀한 연설입니다. 마음속에 새겨지는 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행위는 공을 벽에 던지는 것과 같다.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 그 감사는 언제나 나에게 돌아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돌아옵니다. 질병의 치료로 돌아옵니다. 문제의 해결로 돌아옵니다. 차고 넘치게 돌아옵니다.
이 감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이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r 9, 2025

하나님과의 화목의 삶
(로마서 5:1-11)
주원영담임목사
이 세상에서 정을 나눈 부부도 서로를 마음 속에 깊이 새깁니다. 하물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생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으심. 부활하심”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기독교를 떠받치고 있는 튼튼한 두 개의 기둥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부활에 관한 언급이 없이 의도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롬 5:6-10). 계속해서 그분의 죽음과 골고다의 피흘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말미암아”입니다.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2절). 성령으로 말미암아(5절). 그의 피로 말미암아(9절). 그로 말미암아(9절).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10절).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10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1절).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18절, 로마서 3:25절, 요한1서 2:2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화목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화목한다”는 말은 “들어감을 얻었다”는 뜻이고, “들어감을 얻었다”는 이 말은, “누구에게 계속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내 능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얻은 은혜로 들어감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특권은,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옛 모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 5: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롬 5:10).” 이와 같은 부족하고 더러운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의 옛 모습을 예수님께서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 테텔레스타이).” 십자가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길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면서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내미시는 주님의 그 손을 잡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미시는 그 손을 잡으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미시는 그 손을 의지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의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로마서 5:2-4절 말씀입니다. 그분과 교제하기를 기뻐하며, 그분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환란이 다가와도 주님만을 의지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Mar 2, 2025

예배와 삶의 일치가 주는 축복
(시편 20:1-9 )
주원영담임목사
대부분의 구약은 시간의 흐름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은 만들어진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시편을 해석한다는 것은 매 시(詩)마다 그 배경과 시간을 살펴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별히 시편을 이해하는데는 그 시(詩)를 지은 배경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 시편 20편은 다윗의 시로써 이렇게 시작됩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시 20:1). 누군가가 다윗을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표제와 같이 다윗의 시입니다.
문제는 이 시가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언제쯤 기록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5절 말씀이 이 문제의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5). 5절 말씀과 이어지는 7절 말씀을 보니, “승리. 개가. 깃발. 병거. 말”이라는 단어도 보입니다. 전쟁과 관련이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는 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 전쟁터로 나가는 다윗을 위하여 그 누군가가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한 시라는 말입니다.
누구와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나가는 모습일까요?
그런데 9절 말씀을 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왕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왕은 다윗이 아닙니다(난하주 참고. KJV 참고. 이전성경 참고.). 그리고 1-5절 말씀을 보니 “너”라는 표현이 무려 10번이나 반복되어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9절에 기록된 왕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입입니다(자세한 설명은 설교영상 참고.) 여호와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20편의 배경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기록된 시(詩)가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바로 소년 시절에 목동이었을 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시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어떤 전쟁을 경험했습니까?
1절과 5절과 7절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단어를 눈에 보입니다. 8절 말씀을 보니, “비틀거리며 엎드려지다”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소년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경험한 전쟁,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갔던 전쟁, 원수가 비틀거리다가 엎드려진 전쟁은 바로 골리앗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45절 말씀이 그 전쟁에 다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알기에 담담하지만, 가능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무엘상 17:50절 말씀을 보니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삼상 17:50).
칼과 창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그런 상황인데도, 다윗은 칼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손에 만져지는 작은 돌맹이 몇 개를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던졌던 작은 돌맹이 앞에 무시무시한 장수가 비틀거리며 엎드려지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상황이, 시편 20편의 배경입니다.
성도 여러분. 골리앗은, 오늘 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서 나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들, 바로 내 삶의 문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골리앗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저런 골리앗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떨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왕이 되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온 천지에 남겼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골리앗을 이기게 해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1-3절 말씀을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터로 향하는 다윗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하지만, 성소에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서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데, 성소에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를 드리고 참다운 의미는,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렸던 장소와, 다윗이 나가는 전쟁터가 “하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렸던 예배의 장소와 자신의 삶의 현장이 같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따로따로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배드림의 연속이, 삶의 현장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도이고 세상에서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내 삶의 현장에서 보여지는 내 모습이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하는 것이 그래야 합니다. 행동하는 것이 그래야 합니다. 성도로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기도가 끊어지지 않아야 하고, 찬송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고, 감사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골리앗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맛보시기 원하신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내 삶의 현장을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삶의 현장에서의 모습이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살아가는 삶의 길목에 어려움이 나타났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게 보일지라도, 다윗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만 하면, 그분은 내 눈이 되어 주시고 내 힘이 되어주시고 내 방패가 되어 주시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들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의 현장과 예배와 성소를 하나 되게 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내 앞에 서 있는 골리앗을 바라보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삶의 현장을 주목하시면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이런 모습일 때,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작은 돌맹이와 같은 의미 없는 그 무엇을 내 손에 만져지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만 하면, 내 앞에 있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됩니다. 이 은혜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