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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약

Feb 23, 2025

은혜받은 성도의 삶
(시편 56:1-13)

주원영담임목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시는 일반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특별한 충격을 주시면서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숯불로. 야곱에게는 환도뼈를 치심으로.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얻은 이삭을 드리게 하심으로. 모세에게는 문둥병을 들게 하심으로.)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그래서 다윗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찾아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다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블레셋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으면, 본문 3절과 4절과 11절에 두렵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힘든 상황임에도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56:1).

많은 사람들은 물론 믿음의 선진들까지도 필요한 것만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정말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다윗은 힘든 것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은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어떤 환경에 처해있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다윗이 간구한 “은혜”가 무엇일까요?

3절 말씀이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지금 내가 처해있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다윗은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의지합니다(시 56:4.10.11).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라는 것은 우리들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간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다윗이 사모했던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은혜를 받으면, 어떤 모습들이 나타날까요? 4절 말씀과 8절 말씀이 그 대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입니다(4절). ◉그 입에 찬송이 있는 모습입니다(4절).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입니다(8절).

은혜를 받으면 귀가 열립니다. 은혜를 받으면 입이 열립니다. 은혜를 받으면 눈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자에게,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자에게, 그의 입술을 통하여 찬송이 끊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그의 입술을 통하여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자에게 눈물을 주십니다. 회개의 눈물을 주시고 감격의 눈물을 주십니다. 감사의 눈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또 한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감사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시 56:12).

다윗은 지금 한순간도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쫓기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서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말씀 속에서,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은혜를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은 ◉말씀을 사모하고 ◉찬송이 끊이지 않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함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다윗과 같이 은혜 받은 증거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는 축복이 임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

다윗의 기도는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다른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간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사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은혜를 간구하고 감사하면서 감사제를 드린 자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일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을 때, 그 눈물을 주님이 눈물병에 담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유는, “감사는 기적을 불러오는 마중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가는 동안 “은혜”라는 이 단어를 잊지 않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바로 이 모습이 “은혜”임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감사는 기적을 창조합니다. 감사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신다면,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저는 이 말씀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를 “기적”이라는 단어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과 함께 합독하려고 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기적(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늘 청종하고 ◉입술에서는 찬송이 끊어지지 않으며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그리고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Feb 16, 2025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적을 원하십니까?
(시편 54:1-7 )

주원영담임목사

“마의 11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 3분과, 비행기가 착륙할 때 8분을 합해서 “마의 11분”이라고 말합니다. 사고가 날 확률이 대단히 높은 중요한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항공기 사고의 74% 정도가 이 시간대에 일어났다는 분석 결과도 있습니다. 특별히 착륙을 해야 하는 8분 동안에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인생의 길을 온 힘을 다하여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야 하는 때가 중요한데, 올라가서 얻은 기쁨과 영광만을 손에 쥐고 내려가야 하는 때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계속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항공기 사고나 인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사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맛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삶을 항공기와 비교하면, ◎소년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이기면서 이륙을 하는 모습입니다.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이미 정상에 오른 사람입니다.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착륙을 준비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윗을 위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울의 그런 행동은 진심에서 행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요나단과 자신의 부하였던 도엑을 비롯하여 많은 신하들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그 계획들도 모두 실패합니다.

이쯤되면 한번 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 54편의 표제에 기록된 “십”이라는 곳이 어디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광야에 인접해 있는 그리고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작은 마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다윗이 자신들의 동네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사울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 시편 54편의 배경은 사무엘상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십이라는 곳에 숨어있다는 말을 들은 사울이(삼상23:19). 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좁혀 옵니다. 다윗이 도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시 54:1-3).

사방이 꽉 막힌 그런 상황인데도 다윗은 포기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청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구원하시고, 변호하시고, 들으시고,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생명이 풍전등화인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데, 나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윗은 간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 54:6).

낙헌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 어떤 보상이나 기대를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해주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내 기도를 들어주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낙헌제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렇게 외친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으로 다윗이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시선을 오직 주님께만 향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시 54:7).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란에서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 모두에게도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같이 약속해 주시고 일하시고 역사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나라들을 동원하십니다. 블레셋이 처들어오게 하십니다(삼상 23:27-29). 그리고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쫒던 일을 그만두게 하십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31:4-6절 말씀을 보시면, 다윗을 쫓던 것을 멈추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은 패전하였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세 아들(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과 모든 군사들도 그날에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31:4-6).

성도 여러분, 사울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개선하던 그때부터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삼상 18:7). 사울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사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것들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눈과 귀가 막혀서 이웃나라가 쳐들어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생의 가장 중요한 후반부인 “마의 8분”에 들어선 것입니다. 자신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만을 생각한 나머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데 온 정신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고 할 때에, 극구 사양하면서 나는 아니라고 했던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고 나니, 나 외에는 높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여인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버리셨다고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데도, 자신이 높아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나라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가시 같은 존재인 다윗을 죽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사울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셨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또 다른 일을 맡겨 주시면 또 다시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이,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함께 예배를 드리는 대부분의 성도님들께서는 다윗처럼 이륙하는 단계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착륙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에 와 있습니다. 중요한 때를 살아가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마의 8분입니다. 상황을 잘 바라보셔야 합니다. 사울처럼 높아지고 드러내지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잘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나고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늘 체험하시는 겸손한 모습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Feb 9, 2025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⓻
(창세기 49:29-33)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에는 야곱의 마지막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2025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야곱의 마지막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을까?

본문 29절과 33절을 보니 돌아가리니. 돌아갔더라.” 이런 표현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이때 야곱의 나이는 147세였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야곱은 자기가 유언한 대로 가나안 땅으로 운구되어 조상들이 묻혀 있는 그곳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는 도망하여 외삼촌이 살고 계시는 하란에서 20년을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숙곳이라는 장소에 정착했습니다(창 33:17). 그곳에서 자신을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들을 위하여 우리를 만듭니다. 많은 돈을 주고 넓은 밭을 삽니다(창 33:18-19).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나안이라고 부르는 땅은 요단강 서쪽(지중해 쪽)입니다. 하지만 숙곳은 요단강 동쪽(모압평지)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와 정착한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야곱은 저 북쪽 하란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가나안 땅에 머물지 아니하고 숙곳에 머뭅니다. 잠시 머문 것이 아니라 그곳에 집을 짓고 우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서 밭을 샀습니다. 그곳에 살겠다는 표현입니다. 그곳에 정착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을 성경은 잃게 기록했습니다. “평안히”라고 기록했습니다(창 33:18).

이 단어가 야곱의 마지막 삶의 시간 속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20년 전, 야곱은 형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피곤하여 강가에 돌을 베개 삼고 누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서원을 하며 기도합니다. 창세기 28:20-22절 말씀입니다. 내가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이곳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소득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바로 이 일이 있었을 때, 야곱이 “평안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평안히 돌아오게만 해주시면, 제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하며 살겠습니다. 이렇게 서원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원한 후의 야곱의 삶은, 그야말로 축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재산은 크게 불어나 두 떼를 이루었습니다.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숙곳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곳에 자신을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들을 위하여 우리를 만들고, 땅을 삽니다. 그래서 성경 저자는 20년 전, 야곱이 사용했던 “평안히”라는 이 단어를 다시 끄집어낸 것입니다. 절박했을 때 사용했던 그 단어를 다시금 상기시키면서 야곱을 깨우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의 서원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평안히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수 많은 짐승들과 종들과 자녀들과 아내들까지도 평안하게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힘으로는 풀 수 없었던 형 에서와의 관계도 평안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의 모습은,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까 딴청을 부립니다. 갈 때 마음과 올 때 마음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에 야곱은 분명히 다시 벧엘을 찾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겠다고도 했습니다. 십의 일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서약했는데, 지금 야곱은 숙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벧엘이 아닙니다. 숙곳입니다. 하나님과 약속했던 것을 다 잊어버린 것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이 이렇게 서원했던 것들을 모두 잊고 즐겁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의 사건을 떠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딸 디나의 사건으로 야곱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딸 디나가 숙곳에 살고 있었던 남자들에게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일을 당합니다. 기억하기도 싫은 상처를 입습니다. 무척이나 힘들어 하고 고민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5: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 35:1). “야곱아 벧엘로 올라가라. 네가 있을 곳은 이곳 숙곳이 아니라 벧엘이다. 벧엘로 올라가서 그 옛날 형 에서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하며 기도하고 서원했던 그 일을 기억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결국 야곱은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면서 서원했던 것들을 지킵니다. 35:14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창 35:14).

성도 여러분. 야곱의 하나님은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다른 길로 갈 때,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엎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때까지 말씀하십니다. 돌아올 때까지 일하십니다.

요나가 돌아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이용하셔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탕자가 돌아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 잃게 하시고 돌아오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벧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벧엘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힘들게 하십니다. 때로는 지치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막다른 길을 만나게도 하십니다. 돌아올 때까지 말입니다.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돌아올 때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식솔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바로 왕의 배려로 야곱과 그의 식솔들이 고센 땅에 머뭅니다. 고센 땅은 나일강 하류에 있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도 인간이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창세기 49:29절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줍니다(창 49:30-31).

성도 여러분. 야곱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창세기 23장에는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아브라함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이나 아내의 죽음을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죽음에 슬퍼 애통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걱정이 앞섭니다. 아내를 장사해야 하는데, 장사할 땅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에 땅을 가지고 있는 헷 족속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여 부탁하고는 은 400세겔을 주고 저들에게서 땅을 삽니다. 그리고는 그 땅에 아내 사라를 장사지냅니다(창 23:18-20).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온지 60년이나 되었는데, 왜 지금까지 땅 한 평도 없었을까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아주 비옥한 곳입니다. 바벨론 문명이 탄생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아내 사라를 만나 결혼을 했고 가정을 이루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십니다(창 12:1). 그리고 창세가 11:31절 말씀을 보니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엉뚱하게도 북쪽으로 갑니다. 하란 땅으로 갑니다. 아브라함은 그곳 하란에서 짐을 풀고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 하란에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1). 이 말씀 후에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창 12:5). 마침내”라는 의미는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가나안에 와 보니 하란과는 너무나 비교가 됩니다.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가나안에서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란을 고향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24:3-4절에도 이 마음이 확실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ㄴ미다.아들 이삭의 베필을 찾으려고 몸종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내며서,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고향으로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아브라함은 그곳에 땅을 삽니다. 막벨라 굴을 삽니다. 지금까지는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부터는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아내를 장사지내고 자신도 그곳에 묻힙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도 자부 리브가도 그곳에 묻힙니다. 그리고 애굽의 고센 땅에 살고 있던 야곱이, 나도 그곳에 묻히겠다고 유언을 한 것입니다. 이 유언에 따라 아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국경을 넘어 선조들이 묻혀 있는 그곳에 장사지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의 하나님은 돌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을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들도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하나님은, 예배의 장소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장소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은, 돌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가 하던 일을 그대로 다 놓고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분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Feb 2, 2025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⓺
(창세기 32:24-31)

주원영담임목사

“스캇 펙”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중요한 말을 전했습니다. 원죄는 생각하기를 게을리하는 것이다. 때문에 지혜자는 우리에게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전 7:14).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꾀쟁이이고 거짓말쟁이이고 욕심쟁이이고 문제투성이인 야곱을 모델로 삼으시고,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까?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후에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빈손으로 도망했는데, 지금은 크게 축복을 받아 두 떼를 이루어 거부가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창 32:10).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비록 20년 전의 일이었지만, 두렵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권한을 빼앗은 그 일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창 32:20). 그런데 20절 말씀을 보면, 앞의 “말하기를”은 말한다는 의미지만, 뒤의 “말하기를”이라는 단어는 생각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했다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야곱은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 앞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생각하되 깊이 넓게 그리고 멀리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끝낸 야곱이 행동합니다(창 32:21-23).

성도 여러분.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붙잡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창 25:26). 야곱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손에 쥐려고 했고 손에 쥔 것은 절대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결심을 합니다. 지금까지 생명처럼 사랑했던 것, 땀 흘려 모은 모든 것, 다 내려놓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손에서 다 놓아버렸습니다. 이제 야곱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 32:24). 그렇게 홀로 얍복 강가에 남아 있습니다. 90이 넘은 나이지만,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캄캄한 밤에 홀로 쪼그리고 누워 있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합니다(창 32:24).

성도님들께서는 혹시 씨름경기를 보셨습니까?

씨름을 하려면 먼저 상대방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허리춤을 붙잡아야 합니다. 씨름을 하는 선수가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다면 허리춤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씨름을 하려면 손이 펴져 있어야 합니다. 손에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선수의 허리춤을 붙잡을 수가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캄캄한 밤중에 자신에게 싸움을 걸어온 그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이 모습에서 야곱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실패자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고 야곱처럼 손을 펴서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손을 펼 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내가 손을 펼 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잡혀 주십니다.

이어지는 25절 말씀을 보시면, 야곱의 허벅지뼈는 어긋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 이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래서 이 말씀과 짝을 이루고 있는 호세아 12:3-4절 말씀을 폈습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호 12:3-4).

그날 밤 야곱을 찾아오신 분은 사람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싸움을 걸어오신 것입니다. 그때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졌고 몸도 가눌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몸으로 하나님을 꼭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그때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창 32:26). 움직일 수도 없는 야곱을 밀쳐내시고 가실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놔 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모습 속에서 야곱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또 다시 확인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눈물 앞에서 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그날 밤 얍복강가에서 홀로 한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께서 져 주십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날 밤 그분이 야곱에게 물으셨고 야곱이 대답합니다(창 32:27).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평생 붙잡는 자로 살았다는 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도 있었고(창 28:15), 하나님을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도 했습니다(창 28:22).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야곱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야곱의 이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8).

야곱이 꽉 쥐고 있던 손을 폈을 때, 하나님을 붙잡는 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성도님들에게도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을 붙잡고 있는 손을 펴서 하나님을 붙잡았더니, 하나님께서 붙잡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기업이 되시고 야곱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시고 산성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실패한 자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야곱이시면 ◎손을 펴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손을 펴면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눈물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져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야곱이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너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십니다.

이 은혜가 2025년 한 해 동안 성도님들의 삶에 풍성하고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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