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Jan 26, 2025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⓹
(흰 무늬를 내어 세우다)
(창세기 30:37-43)
주원영담임목사
“퀘렌시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투우장에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투우 경기중에 소가 지치면 관람객이 잘 보이지 않는 경기장 한쪽 귀퉁이로 들어가 잠시 쉬는 곳입니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안전한 곳입니다. 힘들고 지쳤을 때에, 쉼을 얻고 기운을 되찾는 곳입니다. 각종 짐승들과 곤충들이 위험과 추위를 피하고 잠을 청하는 곳입니다.
성도님들에게는 이런 피난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에게 당신의 피난처(퀘렌시아)가 어디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야곱은 “하란에 있는 물 개천 옆이 나의 퀘렌시아, 바로 나의 피난처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곳은, 양들에게 꼴을 뜯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하면서 자신도 쉼을 얻었고, 하나님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았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그곳 실개천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이 그곳에서 아주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창 30:36-38). 남아 있는 흰 양떼를 치고, 나뭇가지에 흰 무늬를 내고, 그 가지를 물 구유에 세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야곱이 남아 있는 흰색 양들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야곱은 너무나 바보스러운 행동 같지만, 결코 바보스러운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흰색 양들 속에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인 알록달록한 유전자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 삶의 현장에 알록달록한 축복의 유전자들을 찾게 하시는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내 눈으로 바라볼 때는 모두 다 흰색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알록달록한 것들을 내 삶의 현장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나에게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참고. 마 13:44).
◉야곱의 두번째 이상한 행동은 세 종류의 나무를 가져다가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있는 모습입니다(창 30:37). 너무 껍질을 다 벗기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흠을 내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어보아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핵심은 나무껍질을 벗겼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흰 무늬를 내었다는데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알록달록한 모양으로 변했다는 이 모습이 야곱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야곱의 꿈입니다.
야곱은 지금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소원을 나뭇가지에 새겼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받을 때 나가서 그려온 대로 땅을 분배받은 그 모습입니다. 저들은 나가서 그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저들이 그린대로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리면 그린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해와 달과 11별이 절을 하는 꿈입니다. 마음에 새겼더니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12해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의사를 찾아가고 좋은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재물을 쏟아부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때,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신 예수를 보면서 독백을 합니다.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내 병을 나을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렸다는 말입니다. 꿈을 꾸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 여인에게 놀라운 치료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그리는 대로 이루어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그리는 그것들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그 어떤 것도 그리지 못하는 그런 신앙은 이제 버리시기 바랍니다.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된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야곱의 마지막 이상한 행동은 세우는 모습입니다(창 30:38).
야곱은 나뭇가지에 흰 무늬를 냈습니다. 소원을 나뭇가지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이 소원이 새겨진 나무가지를 개천에 세웁니다. 야곱의 이해할 수 없는 이 행동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야곱의 눈에 보이는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은 늘 제단을 쌓는 모습입니다(창 12:7-8). 야곱의 눈에 보이는 아버지 이삭의 모습도 능 기도하고 예배하는 모습이었습니다(창 24:63).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 모습을 본받은 야곱이 지금 세우고 있습니다(창 28:18. 31:45. 35:14). 야곱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아, 가는 곳마다 세우는 일에 힘씁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지금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으시면, 은혜 베풀어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 야곱은 장자가 되려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몸부림쳤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자가 되려고, 부자가 되려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손을 펴보니 아무것도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썼지만 손에 쥐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야곱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한 소원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야곱은 완전히 낮아집니다. 내가 성실하게 열심을 다하여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당연하게 축복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그 어떤 꿈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웁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제단을 쌓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푸른 나뭇가지에 그려서, 낮아진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창 30:43).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창 32:10).
성도님들 모두가 야곱과 같이, 이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곱에게 주신 축복을 받아 누리시고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야곱에게 축복은 계속되었습니다(창 30:39-41).
성도 여러분.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야곱의 하나님은, ◎남은 양 떼 속에 축복의 유전자를 숨겨두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는 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배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앞을 향하여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an 19, 2025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⓸
(창세기 30:25-36)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을까? 많은 믿음의 선조들을 뒤로하시고 하필이면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그때 그 현장으로 가서 그 이유를 확인해 보고 있습니다.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살피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을 살피면서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하란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통하여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가집니다(창 30:25). 야곱이 이 생각을 했던 때는 아마도 야곱의 나이는 90세 전후가 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지금까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성공하였는데, 야곱의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탄식합니다(창 30:30).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벌써 하란에서 2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식솔들은 늘었지만, 모은 재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가 되어야 내 집을 세우겠습니까? 이렇게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계획을 눈치챈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이렇게 말합니다(창 30:27-28). 그리고 34절까지의 말씀을 보니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5-36절 말씀을 보니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양이나 염소에게서 얼룩진 것들을 다 야곱에게 주기고 한 그날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양과 염소를 다 골라서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줍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과 야곱이 사이를 3일 길 정도의 거리를 둡니다. 36절 말씀입니다.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창 30:36).
성도 여러분.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조금 전에 약속을 한 외삼촌이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곱씹고 곱씹어야 하는 말씀이 3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창 30:36). 지금 남아있는 양과 염소는 모두 흰색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흰색 양을 치겠다고 합니다. 얼룩진 것, 아롱진 것들이 태어나야 그것들이 야곱 자신의 것이 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흰색뿐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가 성도님들 앞에 펼쳐졌다면, 성도님들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깊은 묵상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특별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야곱은 삼촌 집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와서는 지금까지 양을 치고 살았습니다.
야곱이 7년 동안 어떤 모습으로 양을 쳤습니까? 대충 시간만 지나면 된다는 마음으로 마지못해 양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들판으로 나갔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36절의 말씀은 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런 마음으로 양을 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마리 한마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양을 쳤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흰 양들의 새끼 중에는 알록달록한 양이 태어나기도 했고, 알록달록한 양에게서 흰색을 가진 새끼가 태어나는 것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지난 시간의 경험을 확신하면서 흰 양들을 칩니다. 분명히 태어나는 새끼 중에는 알록달록한 새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흰색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현장에 흰색만 보일지라도 알록달록한 것들을 숨겨 놓으셨다는 이 진리를 잊지 않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삶의 현장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들을 향하여 약속하신 말씀들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의 손을 펼치시면, 길가가 옥토가 되고 돌짝 밭이 옥토가 되고 가시떨기와 같은 환경이 옥토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귀한 은혜와 축복들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묻어 놓고 계신다는 진리를 굳게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보화를 숨겨 놓으신 분이십니다(참고. 마 13:44). 그리고 우리에게 그 보화를 캐내는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숨겨 놓으신 보화를 다 캐내어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an 12, 2025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시로다 ⓷
(창세기 28:10-15)
주원영담임목사
우리가 지내온 삶의 시간들을 돌아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2-3번의 삶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은 완전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삶의 전환점은 어디였고, 모세나 바울 사도의 삶의 전환점은 였을까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님들의 삶의 전환점은 어디였고, 누구를 만났을 때였을까요?
2025년 영원한 교회의 표어인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질문입니다. 삶의 전환점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시간 우리는 열왕기상 6:1절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선조들의 삶의 시간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경의 인물들이 가공된 인물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특별히 야곱에 대하여 자세하게 확인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인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약한 자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택한 자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고,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는 창세기 28:10-11절 말씀을 통하여, 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11절 말씀을 보시면 4번이나 어떤 장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절 말씀을 통하여 그 장소가 어디인지를 밝힙니다.
우리는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잤던 그곳을, 야곱이 처음으로 벧엘이라고 불렀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2:7-8절 말씀을 보니 아브람이 벧엘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24:63절 말씀에는 이삭이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묵상한 곳이 바로 벧엘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하여 멈춘 곳이,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던 그곳으로 야곱이 도망을 간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을 치는데, 그곳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곳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가까운 곳으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갔다는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 야곱과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가까이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았더니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투성이이고 꾀쟁이이고 욕심쟁이인 야곱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연약하고 부족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삶에 지쳐 헤메일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시험당하여 괴로울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내가 어둠속에서 헤맬 때에도 주님은 함께 계셔. 내가 시험당하여 괴로울 때도 주님은 함께 계셔. 기뻐 찬양하네 할렐루 할렐루야 할렐루 할렐루야. 우리 모두 찬양 할렐루 할렐루야. 주님 나와 함께 계시네. 아멘.
야고보 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약 4:8).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가까이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만져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분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은혜를 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야곱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지켜 주겠다.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너와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렇게 하겠다(창 28:15). 하나님께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줄 믿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분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성도님들의 삶에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Jan 9, 2025

신년특별새벽기도회 5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 (여호와 삼마)
에스겔 48:35 (시편 23 :4)
에스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2장까지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임하여서 이스라엘이 몰락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3-48장까지의 내용은 앞부분과 반대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과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3:21절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적군에게 함락되었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드라마의 마지막이 아니라,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이 나타나는 드라마가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서 시온의 땅이 회복될 것이라고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황폐해진 그 땅이 다시 건축될 것이고 그곳에 사람들이 다시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입니다(겔 36:33-35).
그런데 조건이 있다고 하십니다. 회개할 때 회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의 결과로 재건된 예루살렘 성에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입니다. “거기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회복된 예루살렘 성의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도 여호와 삼마,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어떤 모습의 하나님입니까?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벋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고 70년이라는 세월동안 또 다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닥까지 떨어진 그 절망의 자리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고 개입하십니다. 놀라운 해방의 역사를 맛보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감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 126:1). 그리고 저들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3).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감격의 사건이 있습니다.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 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을 성경이 종이나 노예와 같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8:34). 이런 존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벋어나는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의 값을 치르고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사건을 “구속의 사건. 속량의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제목들이 많지만, 그중에 가장 먼저 감사해야 하는 제목은 구원에 대한 감사일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이 어두운 밤과 같은 길을 헤맬 때, 포로의 삶과 같이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십니다. 때로는 불순종하고 말씀을 거역했을지라도, 애통하면서 부르짖으면, 그 모습을 보시고 들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출 3:7).
우리들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분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현재에도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사건은 신앙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신앙생활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구원을 완성해 가는 시작입니다.
신앙인들에게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들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느낄 때마다, 너무나 힘겨워서 그분께 투정을 합니다. 그러다가 이 모습을 보고 듣고 계셨던 그분의 도움으로 고난을 딛고 일어서게 되면, 우리는 주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야곱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창 28:16). 야곱은 느끼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야곱의 옆에 계셨습니다.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에도 이런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후에 고향인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을 향하여 지친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들 곁에 한 분이 찾아오셨고 그들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6).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들의 옆에 계셨는데도 저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만 그랬을까요? 우리는 지금, 우리 옆에 계시는 주님을 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지금 내 곁에 계시는 주님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가리어져서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내왔던 삶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절망했을 그때, 분노했을 그때, 몸도 마음도 지쳐서 쓰러져서 몸부림쳤을 그때, 무섭고 외로웠던 그 밤에도 주님은 그곳에 계셨습니다.
야곱이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하란을 향하여 떠날 때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옆에도 주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제 곁에 함께 하셨는데, 알지 몰랐습니다. 몰라서 원망하고 좌절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그때 내 곁에 계셨고, 지금도 내 곁에 계심을 압니다. 감사합니다.”
그분은 지금도 변함없이 내 곁에 계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지만, 미래에도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회복된 예루살렘 성의 둘레가 지난번보다 넓어진 9Km 정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넓게 회복된 예루살렘 성보다는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회복된 예루살렘 성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예루살렘 성이 영광이 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예루살렘 성의 환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천국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준비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계 21:1-3).
성도 여러분. 천국의 본질은 “여호와 삼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더불어,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입니다. 이 모습이 천국의 본질입니다. 천국은 영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곳 천국에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그래서 이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동안 삶이 힘들지라도 이겨내고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삼아 주시고 천국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시는 분이십니다. 늘 우리 옆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느낄 수 있고 보실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우심에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분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여기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에도 내 곁에 계셨고, 지금도 내 곁에 계시고, 앞으로도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 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다짐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모습을 보신 삼마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늘 함께 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