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Mar 9, 2025

하나님과의 화목의 삶
(로마서 5:1-11)
주원영담임목사
이 세상에서 정을 나눈 부부도 서로를 마음 속에 깊이 새깁니다. 하물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생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으심. 부활하심”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기독교를 떠받치고 있는 튼튼한 두 개의 기둥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부활에 관한 언급이 없이 의도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롬 5:6-10). 계속해서 그분의 죽음과 골고다의 피흘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말미암아”입니다.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2절). 성령으로 말미암아(5절). 그의 피로 말미암아(9절). 그로 말미암아(9절).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10절).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10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1절).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18절, 로마서 3:25절, 요한1서 2:2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화목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화목한다”는 말은 “들어감을 얻었다”는 뜻이고, “들어감을 얻었다”는 이 말은, “누구에게 계속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내 능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얻은 은혜로 들어감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특권은,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우리의 옛 모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롬 5: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롬 5:10).” 이와 같은 부족하고 더러운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의 옛 모습을 예수님께서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 테텔레스타이).” 십자가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길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면서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내미시는 주님의 그 손을 잡으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미시는 그 손을 잡으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미시는 그 손을 의지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의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로마서 5:2-4절 말씀입니다. 그분과 교제하기를 기뻐하며, 그분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환란이 다가와도 주님만을 의지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Mar 2, 2025

예배와 삶의 일치가 주는 축복
(시편 20:1-9 )
주원영담임목사
대부분의 구약은 시간의 흐름을 기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은 만들어진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시편을 해석한다는 것은 매 시(詩)마다 그 배경과 시간을 살펴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별히 시편을 이해하는데는 그 시(詩)를 지은 배경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 시편 20편은 다윗의 시로써 이렇게 시작됩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시 20:1). 누군가가 다윗을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표제와 같이 다윗의 시입니다.
문제는 이 시가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언제쯤 기록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5절 말씀이 이 문제의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5). 5절 말씀과 이어지는 7절 말씀을 보니, “승리. 개가. 깃발. 병거. 말”이라는 단어도 보입니다. 전쟁과 관련이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는 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 전쟁터로 나가는 다윗을 위하여 그 누군가가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한 시라는 말입니다.
누구와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나가는 모습일까요?
그런데 9절 말씀을 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왕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왕은 다윗이 아닙니다(난하주 참고. KJV 참고. 이전성경 참고.). 그리고 1-5절 말씀을 보니 “너”라는 표현이 무려 10번이나 반복되어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9절에 기록된 왕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입입니다(자세한 설명은 설교영상 참고.) 여호와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20편의 배경은,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기록된 시(詩)가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바로 소년 시절에 목동이었을 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시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어떤 전쟁을 경험했습니까?
1절과 5절과 7절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단어를 눈에 보입니다. 8절 말씀을 보니, “비틀거리며 엎드려지다”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소년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경험한 전쟁,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갔던 전쟁, 원수가 비틀거리다가 엎드려진 전쟁은 바로 골리앗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45절 말씀이 그 전쟁에 다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알기에 담담하지만, 가능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무엘상 17:50절 말씀을 보니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삼상 17:50).
칼과 창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그런 상황인데도, 다윗은 칼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손에 만져지는 작은 돌맹이 몇 개를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던졌던 작은 돌맹이 앞에 무시무시한 장수가 비틀거리며 엎드려지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상황이, 시편 20편의 배경입니다.
성도 여러분. 골리앗은, 오늘 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서 나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들, 바로 내 삶의 문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골리앗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저런 골리앗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떨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왕이 되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온 천지에 남겼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골리앗을 이기게 해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1-3절 말씀을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터로 향하는 다윗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하지만, 성소에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서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데, 성소에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기도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를 드리고 참다운 의미는,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렸던 장소와, 다윗이 나가는 전쟁터가 “하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렸던 예배의 장소와 자신의 삶의 현장이 같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따로따로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배드림의 연속이, 삶의 현장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도이고 세상에서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내 삶의 현장에서 보여지는 내 모습이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하는 것이 그래야 합니다. 행동하는 것이 그래야 합니다. 성도로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기도가 끊어지지 않아야 하고, 찬송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고, 감사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골리앗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맛보시기 원하신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내 삶의 현장을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삶의 현장에서의 모습이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살아가는 삶의 길목에 어려움이 나타났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게 보일지라도, 다윗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그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만 하면, 그분은 내 눈이 되어 주시고 내 힘이 되어주시고 내 방패가 되어 주시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들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의 현장과 예배와 성소를 하나 되게 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내 앞에 서 있는 골리앗을 바라보지 마시고,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삶의 현장을 주목하시면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이런 모습일 때,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작은 돌맹이와 같은 의미 없는 그 무엇을 내 손에 만져지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만 하면, 내 앞에 있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됩니다. 이 은혜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Feb 23, 2025

은혜받은 성도의 삶
(시편 56:1-13)
주원영담임목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시는 일반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특별한 충격을 주시면서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숯불로. 야곱에게는 환도뼈를 치심으로.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얻은 이삭을 드리게 하심으로. 모세에게는 문둥병을 들게 하심으로.)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그래서 다윗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찾아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다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블레셋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으면, 본문 3절과 4절과 11절에 두렵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힘든 상황임에도 은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56:1).
많은 사람들은 물론 믿음의 선진들까지도 필요한 것만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정말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다윗은 힘든 것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은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어떤 환경에 처해있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다윗이 간구한 “은혜”가 무엇일까요?
3절 말씀이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지금 내가 처해있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다윗은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의지합니다(시 56:4.10.11).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라는 것은 우리들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간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다윗이 사모했던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은혜를 받으면, 어떤 모습들이 나타날까요? 4절 말씀과 8절 말씀이 그 대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입니다(4절). ◉그 입에 찬송이 있는 모습입니다(4절).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입니다(8절).
은혜를 받으면 귀가 열립니다. 은혜를 받으면 입이 열립니다. 은혜를 받으면 눈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자에게,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자에게, 그의 입술을 통하여 찬송이 끊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그의 입술을 통하여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받은 자에게 눈물을 주십니다. 회개의 눈물을 주시고 감격의 눈물을 주십니다. 감사의 눈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또 한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감사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시 56:12).
다윗은 지금 한순간도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쫓기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서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말씀 속에서,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은혜를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은 ◉말씀을 사모하고 ◉찬송이 끊이지 않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함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다윗과 같이 은혜 받은 증거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는 축복이 임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
다윗의 기도는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다른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간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사망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은혜를 간구하고 감사하면서 감사제를 드린 자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일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을 때, 그 눈물을 주님이 눈물병에 담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유는, “감사는 기적을 불러오는 마중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가는 동안 “은혜”라는 이 단어를 잊지 않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바로 이 모습이 “은혜”임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감사는 기적을 창조합니다. 감사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아신다면,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저는 이 말씀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를 “기적”이라는 단어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과 함께 합독하려고 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기적(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늘 청종하고 ◉입술에서는 찬송이 끊어지지 않으며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그리고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기적을 보여주시고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Feb 16, 2025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적을 원하십니까?
(시편 54:1-7 )
주원영담임목사
“마의 11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 3분과, 비행기가 착륙할 때 8분을 합해서 “마의 11분”이라고 말합니다. 사고가 날 확률이 대단히 높은 중요한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항공기 사고의 74% 정도가 이 시간대에 일어났다는 분석 결과도 있습니다. 특별히 착륙을 해야 하는 8분 동안에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인생의 길을 온 힘을 다하여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를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야 하는 때가 중요한데, 올라가서 얻은 기쁨과 영광만을 손에 쥐고 내려가야 하는 때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계속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항공기 사고나 인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사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맛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윗과 사울의 삶을 항공기와 비교하면, ◎소년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이기면서 이륙을 하는 모습입니다.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이미 정상에 오른 사람입니다.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착륙을 준비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윗을 위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울의 그런 행동은 진심에서 행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요나단과 자신의 부하였던 도엑을 비롯하여 많은 신하들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그 계획들도 모두 실패합니다.
이쯤되면 한번 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 54편의 표제에 기록된 “십”이라는 곳이 어디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광야에 인접해 있는 그리고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작은 마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다윗이 자신들의 동네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사울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 시편 54편의 배경은 사무엘상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십이라는 곳에 숨어있다는 말을 들은 사울이(삼상23:19). 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좁혀 옵니다. 다윗이 도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시 54:1-3).
사방이 꽉 막힌 그런 상황인데도 다윗은 포기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청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구원하시고, 변호하시고, 들으시고,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생명이 풍전등화인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데, 나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윗은 간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 54:6).
낙헌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 어떤 보상이나 기대를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해주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내 기도를 들어주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낙헌제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렇게 외친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으로 다윗이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시선을 오직 주님께만 향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시 54:7).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란에서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 모두에게도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같이 약속해 주시고 일하시고 역사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나라들을 동원하십니다. 블레셋이 처들어오게 하십니다(삼상 23:27-29). 그리고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쫒던 일을 그만두게 하십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31:4-6절 말씀을 보시면, 다윗을 쫓던 것을 멈추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은 패전하였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세 아들(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과 모든 군사들도 그날에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31:4-6).
성도 여러분, 사울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개선하던 그때부터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삼상 18:7). 사울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사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것들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눈과 귀가 막혀서 이웃나라가 쳐들어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생의 가장 중요한 후반부인 “마의 8분”에 들어선 것입니다. 자신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만을 생각한 나머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데 온 정신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고 할 때에, 극구 사양하면서 나는 아니라고 했던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고 나니, 나 외에는 높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여인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버리셨다고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데도, 자신이 높아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나라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가시 같은 존재인 다윗을 죽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사울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셨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또 다른 일을 맡겨 주시면 또 다시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이,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함께 예배를 드리는 대부분의 성도님들께서는 다윗처럼 이륙하는 단계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착륙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에 와 있습니다. 중요한 때를 살아가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마의 8분입니다. 상황을 잘 바라보셔야 합니다. 사울처럼 높아지고 드러내지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잘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나고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늘 체험하시는 겸손한 모습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