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Dec 22, 2024

나는 예수를 잉태했는가?
(요한복음 1:1-4. 14)
주원영담임목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성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예수의 탄생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들이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중의 한 사람, 빛의 화가라고 불리우는 네델란드의 “렘브란트”는 “목동들의 경배”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이미지로 독일의 “게리 멜처스”는 “예수 탄생”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그날의 분위기는 멜처스의 작품이 더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날 그 밤은 고독했고 쓸쓸했고 외로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군천사를 동원하십니다. 그곳에 큰 외침과 찬양이 울려퍼지게 하셨습니다(눅 2:11-12. 14). 하지만 이 외침과 찬양에 모두가 반응한 것은 아닙니다.
이 찬양을 듣고 반응한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매일처럼 하늘을 지붕 삼고 구름을 이불 삼으면서 들판에서 잤던 사람들입니다. 몸에서는 짐승의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한 번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제일 먼저 구주가 탄생하셨다는 놀라운 하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이유는 목자들이야 말로 낮고 천한 자들의 대표적인 모습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있고 권세있는 자들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자들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힘없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성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찾으십니다.
메시야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동방 박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2:1).
성경은 박사들을 “마고이(점성가. 천문학자)”라는 단어로 기록했습니다.
이들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이상한 별 하나가 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 별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때 박사들은 왕이 될 사람이 탄생했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왕이 될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고 별을 따라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들에게 개와 같다는 취급을 받았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메시야를 만나는 축복을 주신 이유는, 저들은 항상 위를 바라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뜻을 찾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앞을 큰 산이 막고 있을지라도 그 산을 바라보지 말고 저 하늘을 바라볼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를 구원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십니다.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 62:5).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 40:31).
메시야 되신 예수님께서는 ◉시므온과 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25절은 시므온에 대하여 기록하고, 누가복음 2:37절은 안나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저들은 한결같이 외로운 자들입니다. 혼자서 쓸쓸히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자들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주의 성전을 사모했고 기도하기를 힘썼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저들에게 메시야 예수를 만나는 놀라운 은총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메시야는 양치는 목동과 같은 낮은 자들을 만나기 원하십니다. 메시야 되시는 우리 주님은 동방박사들처럼 위를 바라보는 자를 주목하시고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므온과 같이 안나와 같이 나이가 많아 세상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소외된 분들도 주님께서는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자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양치는 목자들의 형편을 알고 계셨고, 동방박사들의 형편을 알고 계셨고, 시므온과 안나의 형편과 처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기록하면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표현은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마1:18).” 이외에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특별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오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요 1:11). (참고. 요 1:1. 8:58. 계 16:5). 우리는 어머니의 태를 통하여 태어나지만, 예수님 우리들처럼 세상에서 태어나신 분이 아닙니다. 이미 계신 분이신데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되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요 1:14. 빌2:6-7).
성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지 않고는 사람들의 추악한 죄를 용서해 주실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에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 성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거하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마 1:1). 아브라함이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윗이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이렇게 남자에서 남자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4절 말씀이 이 의미를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마리아에게만 거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를 잉태해야 한다는 진리를 전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요 3:20).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잉태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는 것이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은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지 않고 내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잉태하고 성전 문을 나가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성도님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성도님들의 가정을 인도하시고 성도님들의 남은 삶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Dec 15, 2024

성탄이 주는 축복
(이사야 35:1-10)
주원영담임목사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탄(크리스마스)은 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탄생하신 특별한 의미를 축하하는 날입니다. 이 축제는 평화의 축제이고 축복의 축제이고 사랑의 축제입니다. 감사의 축제이고 기쁨의 축제이고 구원의 축제이고 생명의 축제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성탄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것들을 자복하면서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 되심을 온 세상에 알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통하여 천국에 갈 수 있음을 알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몸을 가지시고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참 메시야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시면, 놀라운 변화가 우리에게 임할 것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본문 속에서 “성탄이 주는 진정한 축복”을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❶인생을 회복시켜 주시는 축복을 주십니다.
1절과 5절과 6절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은,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땅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없고 생명력이 없고 그 어떤 것도 생산해 낼 수 없는 결핍된 곳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죄로 인하여 생각과 마음이 어두워졌기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용서할 줄도 모르고, 참 기쁨도 없는 인생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심령에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땅이 객토가 되어야 기름진 땅이 되듯이, 심령도 진정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변화와 회복을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을 준비하는 성도님들의 삶이, 아름답고 풍요롭게 변화되고, 기적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는 메시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인생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사명이 있다고 교훈하십니다(사 35:3-4). 힘들고 지친 상황이 펼쳐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새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또 다시 말합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인생이 놀랍게 변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사 35:5-6). 비정상적이고 절망적인 인간, 영적으로 불구된 모습을 가진 인간일지라도, 메시야가 오시는 그때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눈뜬 소경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가 있음에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맹인들입니다, 못 듣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자들입니다. 말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고 사슴같이 뛰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말씀입니다. 메시야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35:7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와같은 변화의 기적은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메시야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삶이 변화되어지고 삶이 풍요로워지는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❷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사야 35:8절 말씀입니다. 사막은 길이 없는 곳입니다. 길이 있어도 바람이 불면 있던 길이 흔적도 없이 묻혀버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사막에 대로가 생겼답니다. 정말 놀라운 기적입니다. 설명할 수가 없는 기적입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막과 같은 이 세상에 참된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탄생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거룩한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길이기에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메시야되시는 우리 주님과 함께 안전하게 동행하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이사야 35: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성탄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에 따라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시대의 영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망의 종노릇하던 인생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습니다. 사탄의 세력이 무너졌고, 죄의 세력이 힘을 잃었고, 사망이 항복했습니다. 성탄을 통하여 인생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큰 축복을 안겨주었습니다.
성탄을 통해 주시는 “❶인생을 회복시켜 주신 축복 ❷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ec 8,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메시야를 닮은 고레스
이사야 42:1-4. 44:28-45:1.
주원영담임목사
성도님들께서는 “목자”는 양을 기르고 돌보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목자”라는 단어는 양 무리와 같은 성도들을 돌보는 영적 지도자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경에서 이 “목자”라는 단어가 정치 지도자를 뜻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서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줄 정치 지도자를 목자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사 44:28).
성도 여러분. “고레스”는 페르시야 제국의 초대 왕(BC 559-530)으로 메데와 바사를 통일하고 바벨론을 정복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그의 정복 정책은 고대의 다른 지도자들과 달랐습니다. 정복한 민족의 전통이나 종교를 존중하는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런 정책의 일환으로 그동안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칙령을 발표합니다(BC 538년). 그 칙령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를 주어 그들을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내용이었습니다(스 1:1-3). 바벨론에서 70년동안이나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방을 준다는 칙령을 발표한 고레스는 이스라엘에게는 구세주였습니다. 그래서 고레스가 이사야서에서 구세주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고레스의 이런 모습이, 메시야를 예표하고 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의 모습.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➊정의를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이사야서에는 4편의 “종의 노래“가 등장하는데 본문이 그 첫 번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셔서 보내주실 종을 소개하면서 그를 찬미하고 있습니다(42:1). 이어지는 3절과 4절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종은 정의를 세우는 종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종의 정의로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레스가 왕이 되었을 때 행한 중요한 업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포로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고레스 왕의 정의였습니다.
우리들은 정의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자유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제한한다면 그것은 정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살아가는 이 땅에 모든 영역에서 정의가 더욱 빛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하고 그 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메시야의 모습은 ➋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입니다(42:2-3).
우리가 믿는 메시야의 모습은 “긍휼을 베푸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마태복음 12:17-21절에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후에 오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예언이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을 베푸시는 삶이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님들의 삶에서 힘든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28절 말씀과 같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뿐만 아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3). 이렇게 약속하는 말씀을 붙잡고,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시야의 모습은 ➌회복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모습입니다(44:28).
고레스가 직접 예루살렘을 중건하거나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단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예루살렘 성이 중건하고, 성전이 다시 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래스 왕의 결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레스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의 경험하도록 도와준 메시야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신 이유가, 회복을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우는 것은 어렵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나와 우리 가정이,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모두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복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의 가장이, 우리 교회의 목회자가, 이 사회와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회복의 은혜를 간절히 간구하는 그런 지도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메시야의 모습을 닮아가는 또 한 사람의 고레스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간절한 기도가, 정의가 굳게 세우고, 긍휼이 베풀어지고, 회복의 은혜가 임하게 하는 기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ec 1,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밤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
요한복음 3:1-5 (3:1-15)
주원영담임목사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지금의 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변화되고 싶고 다시 새롭게 살고 싶다는 갈망이 있다고 합니다. 새롭게 변화되는 것,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거듭남의 초점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다시 새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워야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거듭남(Born-Again)”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는 삶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남들의 시선이 뜸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온 이 사람과 나누신 대화를 묵상하면서, 우리 인생의 운명을 새롭게 바꾸는 거듭남에 대하여, 누가?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을 드리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누가(Who) 거듭나야 합니까?
많은 성도들은 거듭남이라는 말에 대하여,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보편적인 삶을 살아온 나 같은 인생과는 거리가 먼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요3:1).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 사람은,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당시 사회적으로 최고의 위치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을 보니,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와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요3:10).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당시의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훌륭한 최고의 지도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만나자마자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나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문제 앞에 나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거듭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고백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Why) 거듭나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늦은 시간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요3:3). 거듭남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거듭나야 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요3:5).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삶이 바뀌게 됩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What) 거듭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12절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삶에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면,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을 우리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죄인된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며 그분의 자녀가 되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구원의 주님. 우리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속에서 거듭남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누가 거듭나야 하는지? (내가 거듭나야). ◉왜 거듭나야 하는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는지? (영접하고 믿음으로). 이 질문과 해답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질문이 우리들의 평생의 질문이 되고, 이 고백이 변하지 않는 평생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