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Oct 27, 2024

성도의 유일한 자랑거리
(로마서 3:21-28)
주원영담임목사
종교개혁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그 모든 과정들을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알고 계신 것과 같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면죄부 판매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카톨릭은 이 돈의 절반은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절반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사용했습니다. 잘못된 생각과 쓸데없는 자랑이 종교를 부패하게 만들고 또한 종교인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부패해지는 이유는 자랑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도 그랬습니다(마4:8-9). 세상의 영광이나 세상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싶어 하면, 결국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맙니다. 교회가 보여지는 것을 자랑하기 시작하면, 부패하게 된다는 것을 종교개혁사건이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성도님들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자랑해야 할까? 성도들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야 할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 사도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참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빌3:5-6). 이것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셋째 하늘이라는 천국을 경험했습니다(고후12:2).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행9:3-4). ◉기적을 보여준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행14:8-10). ◉기도의 응답을 경험했습니다(행16:24-26). ◉환상도 경험했습니다(행16:9-10).
바울 사도처럼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고,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큰 자랑거리인지 다른 것은 다 시시해 보여서 내려놓았다고 말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예수를 믿는 많은 성도들의 문제점은, 진정한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것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요일2:16).
종교개혁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다 지나가 버리고 마는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시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삶일까요?
❶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분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내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감격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바라기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담대하게 자랑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삼으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➋구원을 주신 예수님의 속량의 은혜를 감사하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는데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법으로나, 행위로나, 고행으로나, 세상의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량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마르틴 루터”는 카톨릭에서 가르치는 대로 “라테란 성당”의 “스칼라 산크타”라는 거룩한 계단을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오르고 또 오르면서도 그 고행을 참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용서받음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도 평강도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곤고해지고 더 힘들어져갈 뿐이었습니다.
그런 루터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은, 바로 믿음이라는 깨달음입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죄를 사함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믿음의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는 “은혜의 법”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법을 발견한 루터와 바울 사도는, 이 귀한 법을 자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루터와 같이, 이 은혜의 법을 깨달은 바울 사도와 같이, 속량의 은혜를 감사하시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➌믿음의 법이 나를 향한 것임을 확신하는 삶입니다.
로마서 3:22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법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법입니다. 이 법이 나를 구원하는 법이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자랑은 한순간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간다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요일2:17). 뿐만 아니라 이전에 자랑으로 삼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를 원했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기 원했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주님만을 자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종교개혁은 구원을 받은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자랑을 다 버린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인간의 자랑거리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참 의미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을 자랑하고, 그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그분의 은혜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되었음을 자랑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Oct 20,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나다나엘의 고백
(요한복음 1:45-51)
주원영담임목사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이웃들은 복음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만나주신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친구였던 빌립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을 통해서, 한 사람의 이웃을 전도하는 예수님의 효율적인 전도의 방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전도하려면 ➊인간은 누구나 부족한 점(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죄인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피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약점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할 때 이런 약점들이 장애물로 작용해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나다나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약점을 한마디로 말하면 “편견”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 대한 편견은, 단순히 이해되고 설명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너무나 순진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빌립이 나다나엘의 편견을 깨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 1:46). 빌립의 대답은 단순하지만 직설적이었습니다. “와서 보라.” 이 말 한마디였습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런 방법으로 나다나엘의 편견이라는 약점을 깨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전도하실 때, 기독교를 변명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논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이렇게 전하십시오. “한번 와 보세요.” 나머지는 성령님께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전도를 하려면 ➋인간은 누구나 약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를 하기 위하여 이웃들을 접촉할 때, 이웃의 마음을 열려면 그 사람의 강점을 발견하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비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열등하다고 느낄 때, 자신을 방어하는 행동을 취합니다. 하지만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는 방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고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사용하신 방법이 이 방법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 정직함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 이 한마디의 칭찬이 나다나엘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열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리적인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논쟁을 하는 대신 그들의 진정성을 칭찬해 보십시오. 인사치례가 아니라 있는 것을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서 칭찬받을 만한 점을 발견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 나다나엘의 마음의 문이 열린 것처럼, 우리 이웃들의 마음의 문도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전도를 하려면 ➌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도록 하고 믿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구원의 단계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너를 전도한 사람은 빌립이지만 빌립이 너에게 전도하기 전까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는지를 나는 다 알고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49).
나다나엘은 마침내 예수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 바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려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도록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인생의 해답이고 희망이고 구원이라는 이 진리를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변화 받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다나엘을 전도하신 예수님의 이 모습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고 본받으셔서, 우리의 전함에도 열매가 맺어지기를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Oct 13,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중풍병자
(마가복음 2:1-12)
주원영담임목사
본문에는 한 중풍병자를 위하여 네 친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중풍병은 불치병이었기에 이 병에 걸리면 미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들은 그의 친구들은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붙잡았습니다. 결국 친구들의 우정이 어느 날 중풍병자에게 선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네 친구의 결단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네 친구의 결단은 믿음에서 시작했습니다. 병석에 누워있는 친구가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하여 특별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예수님께서 먼저 눈여겨 보신 것은 들것에 누워있는 중풍병자가 아니었습니다. 친구를 들것에 메고 온 친구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위하여 기도를 드릴 때, 내가 먼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믿음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친구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 가까이에 갈 수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지붕을 뜯기로 한 것입니다. 지붕을 뜯는 것은 위험하고 모험적인 행동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친구를 살리겠다는 집념하나로 위험한 모험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에게는 자신의 것들을 희생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자신들의 시간을 냈습니다. 지붕을 뜯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비난과 항의를 극복했습니다. 대가의 지불 없이는 위대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새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가 병 고침을 받은 축복이 주는 교훈도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들의 희생으로 중풍병자는 병을 고침받았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가 받은 선물은 병고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현재와 미래의 축복을 함께 받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대부분의 선물들은 현재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미래를 보장하는 선물은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까지를 보장해 주는 선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받은 선물은 내면의 문제들까지도 해결함을 받는 선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그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5)
예수님께서는 겉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치료보다 속사람이 치유되고 회복되고 구원을 받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속사람의 치유 없이 겉 사람의 치료함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몰랐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언하시자 놀란 반응을 보입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 2:7).
성도 여러분. 죄인인 인간은 죄인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분에게만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몰랐던 것은,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들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씀합니다.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요 12:45). 예수가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가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그 예수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가 소망이시고 예수가 구원이십니다.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 우리의 현재는 새롭게 변화되고 영원한 미래가 열려집니다. 속사람이 치유되고 겉사람도 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완벽한 선물, 최고의 선물, 유일한 선물이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전해줄 유일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전할 유일한 복음의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를 선물하시고 이 예수를 전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Oct 6,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가나안(수로보니게) 여인
(마태복음 15:21-28)
주원영담임목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끔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운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불안한 생각들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신앙인들에게 이런 생각은, 죄의식과 연관되어 삶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버림받는다는 두려움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마침내 큰 은혜를 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2,000여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믿음의 본이 되는 여인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여인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교훈을 얻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은 ❶냉혹한 현실을 극복했습니다.
이 여인은 가나안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막7:26). 지금의 레바논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귀신들인 어린 딸의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노골적으로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마15:23).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살아오시는 동안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런 경우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여인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간청합니다. 그리고는 두 마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마15:22. 25).
마침내 이 여인의 기도가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사건 이후에,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여인의 기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 모양의 어려운 일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고 견디기 힘든 냉혹한 현실이 두려움을 줄 때, 이 여인처럼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내가 믿고 의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여인은 ❷현실에서 받은 자존심의 상처를 극복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자존심의 상처를 받는 일은 참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존심의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두 가지의 반응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상대를 공격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성숙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보여준 반응이 바로 현실을 인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 여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마15:26). 그런데 이 여인의 반응이 놀랐습니다. 배우고 싶은 반응을 보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 현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가는 동안 이 여인의 모습을 본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존심을 생각하기보다, 우리 주님의 긍휼하신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여인은 ❸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은 현실을 극복했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이 여인도 지금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마15:22-23). 예수님의 반응이 냉담합니다. 아니 반응이 없으십니다.
믿음의 사람 욥이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욥23:8-9. 13:24).
가까스로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고 무너져버린 자존심을 참았는데, 주님께서는 무시합니다.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상대를 안 하시겠다고 하십니다(마15:24). 우리를 알고 있는 사랑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긍휼하시고 자비로우신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럼에도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엎드립니다. 또 다시 간청합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이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냉혹한 현실이 내 삶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자존심의 상처를 받으셨습니까? 그 상처를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자존감의 상처를 생각하기보다, 주님의 긍휼하신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피 흘리신 그 손으로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으십니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인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셨던 분이십니다.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와 같을 때 우리 귀에 이런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너를 잘 안다. 네 기도를 들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이 음성이 들려지는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