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May 3, 2026

성도의 삶. 성숙.
(베드로전서 2:1-3. 베드로후서 3:18.)
주원영담임목사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에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적 발달장애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성장하지 못하는 당신의 자녀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이, 가슴 아파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이력과는 상관없이 영적 발달장애를 겪는 수 많은 영적 미숙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두 가지 경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름만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명목상 기독교인”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거듭남의 확신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는 “미성숙한 기독교인”입니다. 때때로 이분들로 인하여 교회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베드로의 삶을 통하여 권면을 받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영적 발달장애를 극복하고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아직은 영적으로 젖을 먹고 자라가야 할 갓난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바울 사도도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
성도 여러분.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교훈하고 있는 영적 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성경 기자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영적 아이들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먹기는 하지만,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는 영적인 영양결핍(말씀의 무지)의 상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늘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몇 년이나 예수를 믿었느냐? 직분이 무엇이냐? 이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아직도 영적인 미숙아의 상태입니다(고전 3:3. 벧전 2:1). 우리 안에 아직도 이런 모습들이 남아있다면, 아직 내가 영적인 아이라는 증거들입니다. 영적인 성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영적인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놀라운 특징입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기독교의 정체성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바로 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에베소서 2:8-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도,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영적 성숙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은혜들을 사모하는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신앙은 영적으로 병든 신앙입니다. 찬송가 183장의 가사처럼,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은혜를 공급받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히 4:6). 우리는 늘 부족한 존재이지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와 은혜를 공급받아 영적으로 자라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영적인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의 영적으로 성숙하게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은혜와 함께 지식을 강조합니다. 이 지식은 영적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입니다(벧후 3:18).
영적 성숙의 본질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며 그를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배고픔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의 사람이 성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늘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읽고 배워야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깨닫고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결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배우셔서, 영적으로 자라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pr 26, 2026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들
(고린도후서 12:7-10)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가 기록한 성경들을 세밀하게 읽어보면, 그 편지들 속에는 우리의 무릎을 치게 하는 몇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자랑”입니다. 자랑하는 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대단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자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부정적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 자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런데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는, 이 자랑이라는 단어를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드러내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우상에게 드리는 제물에 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혼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서를 자세히 읽어보시면, 이와 같은 모든 문제들이 “자랑”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앞부분인 고린도후서 10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고후 10:13). 10:15절 말씀도 분수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랑할 것은 다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0:16-17절 말씀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6-17).
이어지는 11장에서도 이 자랑이라는 말은 계속됩니다.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고후 11:10). 11:12절, 11:26절, 11:18절 말씀에서도 계속해서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나열하더니, 11:30절에서는 부득불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어쩔 수 없이 자랑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마다 조심스럽게 자랑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장에 와서는 부득불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왜 자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12:1절 말씀입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후 12:1). 바울 사도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자랑하는데,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부득불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 12:5).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을 예로 들면서 자랑한다고 합니다. 낙원에 갔다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부득불 자랑하는 이유를 한 번 더 말합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후 12:6).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합니다. 자랑을 하다 보면, 말을 많이 보태서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말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 말하는 것을 그만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합독한 7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와 “자기 자신의 자랑”이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자신에게 가시가 되어 늘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그런데 첫 번째 기도에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도에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χάριζ)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늘 찌르고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랑이 언젠가부터 삶의 가시가 되어 자신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왜 그렇게 자랑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세상적인 것,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자랑하면서 살았더니, 나중에 그것이 자신에게 올무가 되어서 오히려 육체의 가시로 계속해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아가고 있더라도, 그 육체의 가시와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나에게 은혜를 주시기는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시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려면, 나의 약함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나의 약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약한 부분을 더 강하게 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견치 못한 일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우리만큼 준비하지 못해서, 우리보다 지혜롭지 못해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들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보살펴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가진 것, 내게 있는 것,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드러내고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내게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를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복음을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예수와 복음을 사랑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의 약한 부분까지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 약함이 더 강해지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Apr 19, 2026

어떤 표징이 나타날까?
(요한복음 20:11-18)
주원영담임목사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식당에 가면 파를 건져내는 사람, 마늘을 건져내는 사람, 두부를 먹지 않는 사람, 당근을 골라내는 사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음식을 가립니다.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왜 충격을 받은 기억들이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깊게 각인되어 남아있을까요? (이런 현상들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빙산이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어떤 무리들이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그 무리들은 예수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믿고 따랐던 예수가, 어느 날 붙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예수를 죄인으로 판단하고 십자가형을 구형했습니다. 예수는 손과 발에 못이 박혔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리고 높은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더구나 원수들은 그의 속옷을 벗겼고 어떤 병사는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고, 잠시 후에 “테텔레스타이” 하시고는 운명하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하였고 자신을 위하여 준비한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요 19:38-40).
이렇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장례를 마쳤습니다.
이런 일이 지나고 3일이 되던 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두운 시간에, 향유를 가지고 예수의 무덤을 찾은 여인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저만큼 굴러가 있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세마포로 염을 했는데 그 세마포가 가지런히 개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나 말을 합니다(요 20:13). 허탈함을 가지고 몸을 돌이켜 무덤에서 나오는데, 그 여인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부활하신 예수께서 대화를 나눕니다(요 20:15-16). 이른 새벽, 아직 어두웠을 때에, 무덤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여인들은 이런 행동을 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마 28:8). 기뻤지만, 나무나 무서웠기에 그 현장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내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부활 예수를 만나기 전에 저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무서움과 좌절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러간 것처럼 그 마음속에서 다 물러가고, 저들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이 가득차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여인들에게만 일어났던 변화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서 떨고 있었던 그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도 여인들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걱정하면서 엠마오를 향하여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던 이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도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내일의 부활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이 아닙니다. 오늘의 부활입니다. 막연한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 부활입니다.
실의에 빠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우리들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그분은 오늘의 부활 예수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 이런저런 문제들로 말미암아 막달라 마리아처럼, 제자들처럼, 엠마오로 내려가는 자들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있고, 질병으로, 사업으로, 물질로, 자녀의 문제로, 인간관계로 힘들어 하고 계신 성도님들이 계신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외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내적으로는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고, 외적으로는 부활 예수가 필요한 자들을 찾아가게 됩니다. 말하게 됩니다.
◎무덤가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요 20:18).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입을 열어서 말을 합니다,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요 20:25).
◎인간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을 제자들이 이야기하기에 믿을 수 없었던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고는 외칩니다(요 20:28).
◎희망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의 터전인 엠마오를 향하여 힘없이 걸어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오던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눅 24:33.35).
◎황당한 주장을 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라는 공문을 품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이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변화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행 9:20-22).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저들의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그냥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만 믿어집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두 가지 표징이 나타납니다. ◎기쁨과 평안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지배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에게 평안이 찾아오고 자연스럽게 내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본능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요 20:17. 28:7.19).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입술을 열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 주시고 함께 일해 주십니다. 우리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나아가면, 성령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가시면서 다 준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진리를 믿고, 입을 여시는 성도가 되시고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만이 “길”이십니다. 주님만이 “진리”가 되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 되십니다(요 14:6). 우리가 이 진리를 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눅 9:26).
Apr 12, 2026

부활하신 예수가 주시는 오늘의 은혜
(요한복음 20:19-29)
주원영담임목사
지구촌에는 약 4,500여개의 종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님들께서는 그렇게 많은 종교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왜 예수를 선택하셨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한 시간 좋은 말씀을 듣고,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예배만을 드리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왜 예수를 왜 믿는지, 내가 믿는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확실히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힘껏 눌러 씌우고, 손과 발에는 대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지 6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라는 사람은 운명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가 죽은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요 19:32-34). 예수의 시신은 십자가에서 내려졌고 아리마대라는 사람의 무덤에 장사 지내졌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았습니다. 그것도 믿을 수가 없었는지, 무덤 입구를 인봉했고 군사들을 배치시켜서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난 날, 무덤을 막았던 돌은 저만치 굴려졌고, 그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세마포는 가지런히 개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 안에 계셔야 했던 그분이,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하셨습니다(고전 15:3-8).
부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여러 명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는 여러 장소에 나타나셨습니다. 한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백 명이 동시에 보았기에 그것은 속일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순간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40일 동안 반복되었던 이 일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착각의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있기에, 의심 많기로 유명했던 예수의 제자 도마도 예수 앞에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예수 믿는 사람을 경멸했던 유대인이면서 수학자였던 “아인슈타인”도 그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에 교회를 무시하고 경멸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인생의 석양 녁에 나는 교회 이외의 그 어떤 곳에서도 내 영혼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부활의 주님 품으로 돌아온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의 부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예수의 부활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나 또한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고전 15:51-52). 그분이 부활하셨습니다. 나 또한 그분처럼 부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고전 15:20).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일은 장차 일어날 일입니다. 내일의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 부활이 죽은 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오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윗의 표현과 같은 힘들고 어려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예수 부활이 지금의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까?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 부활사건이, 우리가 장차 죽은 후에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까?
천안함 사건(2010년)으로 우리의 아들들 46명이 차가운 바다속에 수장되었습니다. 세월호 사건(2014년)으로 270여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상기온으로 인한 사건. 전쟁과 지진으로 인한 사건들이 뉴스를 통하여 우리의 귀에 들리고 눈에 보입니다. 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고 현실의 모습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죽은 후 먼 훗날에 당신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고 기쁨과 평안을 누릴 것이라는 소식이, 질병 때문에 고통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기대가, 불행은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과연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을까요? 믿지만, 믿어야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가슴에 와 닿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우리와 똑 같은 환경에 던져진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저들은 지금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문을 닫고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어두운 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죄책감과 상실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들에게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려버리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예수였습니다. 그분은 죄책감과 상실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셨지만, 희망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6). 이 말씀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왜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평강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까?
그래서 2,000년 전의 그 현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한 여인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1). 두려움에 떨고 있는 11명의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19).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요 20:27).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요 21장).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은, 한결같이 현재의 부활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지금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 처절한 자들입니다. 평안과 기쁨이 필요하고, 희망과 꿈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오늘의 삶이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칩니다. 두려움을 떨어내고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옵니다.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삶의 현장에서, 오늘의 부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오늘의 부활의 기쁨과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성도님들을 축복합니다. 부활 예수를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부활 예수를 믿으면, 내일의 부활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은, 내일의 부활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어하고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저와 우리들이 다시 살아나는 현재의 부활입니다. 치료함을 받고 회복을 경험하는 현재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왜 예수인가? 왜 기독교인가?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유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들에게 오늘의 부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이 있더라도 부활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이 해결해 주십니다. 물질의 문제도, 자녀의 문제, 마음의 문제도, 건강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해결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음성을 성도님들에게 들려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음성이, 성도님들 가정에, 영원한 교회에, 내 사업장과 일터에, 들려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도 되지 않고 우리의 능력으로도 되지 않지만, 오늘 우리가 부활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슥 4:6).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내 삶에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주시기만 하면, 나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에서 해결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의미 없는 삶이, 의미 있는 삶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과 질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실망과 좌절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을 마음껏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에게, 내일의 부활은 물론이거니와, 오늘의 부활도 경험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