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Jun 9, 2024

참 그리스도인의 삶
(고린도전서 10:23-24)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신앙인들의 관심사는 이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항상 이법적입니다. “옳고 그르고. 좋고 싫고. 맞고 틀리고.”
하지만 성도인 우리들은 세상의 삶의 방법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도 세상과 함께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옳은 방법같이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향하여 생명이 살아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유하다”는 것입니다(고전10:23).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신앙인이 되면, 자유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가둘 수가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오히려 영원한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삶에서 모든 일에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가졌지만, 그 자유를 다 누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고전10:23-24).
자유로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왜 그런 모든 것에서 다 자유하지 않는 게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이런 모습 속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후에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바울 사도의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잘 알아야 오해가 없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했던 당시에는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그 제물의 일부분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는, “시장에서 사온 고기를 먹었을 때, 죄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조심스럽지만, 결론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고기가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자유하기에 먹어도 되지만, 우상에게 바친 음식은 먹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입니다. 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흑백의 논리로 판단하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과 출발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출발이 다르기에 삶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함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자유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한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신앙인으로 가장 위험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이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무시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올바른 판단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내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내게 있더라도, 주님의 유익과 주님의 덕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는, 어떤 것이 더 유익하며, 어떤 모습이 더 덕을 세울 수 있는 모습일까? 이것을 신앙의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의 제목인 “참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고전10:24).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을 때,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신앙의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세상에 전하는 주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Jun 2, 2024

소원을 이룬 한 여인의 믿음
(마태복음 15:21-28)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우리가 합독한 말씀에는 버림받는다는 두려움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마침내 큰 은혜를 받은 한 여성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버림받을 뻔했지만,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큰 칭찬과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 여성이 버림받지 않고 은혜를 받은 이 사건을 생각하면서, 이 여인이 극복한 장애물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생각하면서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❶현실적인 냉대를 경험했고 극복했습니다. 성경은 이 여성이 살고 있는 곳을 가나안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두로와 시돈이라는 해안 도시에서 살던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지금의 레바논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의 병을 고침받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간청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마15:23). 따뜻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들도 종종 이런 상황에 직면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를 힘들게 하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여인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높입니다(마15:22.25). 그리고 이 기도가 마침내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저런 어려운 일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 견디기 힘든 냉혹한 현실이 나에게 두려움을 줄 때, 이 여인처럼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내가 믿고 의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여인이 극복한 또 하나의 어려움은, ❷자존심(자존감)의 상처를 받았지만 이겨냈습니다. 현실에서 받은 상처를 극복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이런 일을 당할 때 중요한 것은, “상처를 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시키거나,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살펴보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은 이런 수모를 극복했습니다(마15:27). 예수님께서 상처가 되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겨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살아가는 동안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저런 말을 들을 때, 이 여인처럼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하신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❸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겨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보여 주었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때때로 나는 절박한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상황을 극복해야 합니다. 응답의 은혜를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이겨내야 합니다.
지금 이 여인은 간절한 기도에는 꼭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간절히 간청합니다(마15:25). 결국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수밖에 없는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마15:28).
성도 여러분. ❶냉혹한 현실이 내 삶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❷자존심(자존감)의 상처를 받으셨습니까? 그 상처를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❸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으십니까?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와 같을 때, 우리 귀에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May 26, 2024

우리가 원하는 건강한 교회
(에베소서 1:1-2)
주원영담임목사
지난 주일 저는 “필립 얀시”의 책의 글을 인용하여 교회는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올바른 교회는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간직해야 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바울 사도는 “두란노 서원 사역”에 자신의 역량을 쏟아부었습니다(행19:8-10). 그리고 그 사역은 온 아시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행19장). 하지만 복음을 전하던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가 에베소서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핵심은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일 때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❶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엡1:1). 특별히 1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성도(구별된 자)라고 불렀고 신실한 자(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서 분리되어 나와서 하나님께 속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믿는 백성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❷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2절).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사의 말을 전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입니다. 희랍인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은혜(카리스)이고, 히브리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모하는 단어가 평강입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가 교회의 본질입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언약들은 조건적이지만, 주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입니다(엡2:8).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조건이 따른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조건 없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한 조건 없이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바로 교회는 은혜 위에 세워진 은혜의 공동체이기에, 은혜의 감격을 잃어버리면 변질되고 맙니다. 교회가 그리고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이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변질되지 않는 성도가 되고, 변질되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❸교회는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은 진정한 은혜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평화도 알지 못합니다. 참된 은혜와 평화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세요. 세상은 끊임없이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는데, 왜 평화의 열매를 맺어지지 않을까요?
평화를 주는 근본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진정한 평화는 성경을 떠나서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3-14절 말씀과 2:16절 말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변질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건강한 교회, 우리가 바라는 교회는, 참된 은혜가 있고 참된 평화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이곳에 세워진 영원한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May 19, 2024

우리가 꿈꾸는 교회
(여호수아 8:30-35)
주원영담임목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아이 성 전투에서 실패한 이유는 아간의 잘못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간의 잘못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에 어려움이 찾아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간의 문제는 표면에 드러난 문제일 뿐입니다. 내면적인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인간의 경험을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가 아이 성 전투에서의 패배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이 성과 같은 작다고만 생각했던 문제들이 우리의 가는 길에 발목을 잡게 됩니다.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노력과 내 경험을 앞세우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습이 아이 성을 정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아이 성을 정복한 저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서 갈릴리바다 위쪽인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왜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이 있는 북쪽으로 올라갔을까요?
하나님께서 지난날 모세를 통하여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1:29). 그리심 산은 숲이 우거진 산입니다. 그러나 에발 산은 보시는 대로 민둥산입니다. 돌산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자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심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복을 받을 것이지만, 에발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심 산에 가는 것만으로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정말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여호수아 8:30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수 8:30).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에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 산에 제단을 쌓습니다.
왜 에발 산입니까?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지파별로 움직였기에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자파에 소속되어 있기에 당연히 그리심 산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에발 산으로 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호수아가 왜 에발 산으로 갔습니까?
우리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저주의 산이 축복의 산으로 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소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에발 산에서 드렸던 제사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십니다.
❶교회는, 교회 본래의 모습이 간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변질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마9:35).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중의 몇몇 교회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내세웁니다. 웅장함을 자랑합니다. 부자됨을 자랑합니다. 교회의 본래 모습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❷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 8:34-35절을 보세요. 여호수아가 축복과 저주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수8:34-35). 균형잡힌 교회의 모습입니다. 영성학자 필립얀시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고(예배),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고(훈련. 교육), 세상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
❸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어느 틈엔가 그리심 산에 있는 사람과 에발 산에 있는 사람이 모두 한곳에 모여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말씀을 낭독하는 소리만 들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힘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