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Nov 30,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밤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
요한복음 3:1-5 (3:1-15)
주원영담임목사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지금의 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변화되고 싶고 다시 새롭게 살고 싶다는 갈망이 있다고 합니다. 새롭게 변화되는 것,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거듭남의 초점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다시 새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워야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거듭남(Born-Again)”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는 삶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남들의 시선이 뜸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온 이 사람과 나누신 대화를 묵상하면서, 우리 인생의 운명을 새롭게 바꾸는 거듭남에 대하여, 누가?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을 드리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누가(Who) 거듭나야 합니까?
많은 성도들은 거듭남이라는 말에 대하여,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보편적인 삶을 살아온 나 같은 인생과는 거리가 먼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요3:1).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 사람은,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당시 사회적으로 최고의 위치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을 보니,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와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요3:10).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당시의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훌륭한 최고의 지도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만나자마자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나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문제 앞에 나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거듭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고백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Why) 거듭나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늦은 시간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요3:3). 거듭남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이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거듭나야 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요3:5).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삶이 바뀌게 됩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What) 거듭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12절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삶에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면,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을 우리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죄인된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며 그분의 자녀가 되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구원의 주님. 우리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속에서 거듭남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누가 거듭나야 하는지? (내가 거듭나야). ◉왜 거듭나야 하는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는지? (영접하고 믿음으로). 이 질문과 해답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질문이 우리들의 평생의 질문이 되고, 이 고백이 변하지 않는 평생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Nov 23,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새로운 삶의 눈을 뜬 사울
(사도행전 9:10-19)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에는 얼마간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한마디로 “다시 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절과 17-19절 말씀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사울이라는 청년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가던 중에 다메섹이라는 지방에서 예수를 만났고, 얼마동안 눈이 어두워졌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혹시 성도님들 중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나의 삶의 모습들이 너무나 힘들어서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새로운 세상이 열려서 새로운 것을 보기 원하시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성도님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뒤로하고, 새롭게 펼쳐진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눈을 떠서 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울 사도의 모습을 통하여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다시 눈을 떠서 보아야 하는 것은 ❶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참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나 자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지배하는 인본주의(세속적 휴머니즘)의 본질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 앞에서, “당신만이 나의 참 주인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우리에게서 늘 이런 고백이 넘쳐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울은 외적으로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살만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의 외적인 환경을 빌립보서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 3:5-6). 사울은 자신의 지식을 믿고,, 자신의 신념을 믿고, 자신의 철학과 도덕성과 고결성을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예수를 다메섹에서 만나자마자 거꾸러진 것입니다. 그때 그가 외칩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행 9:5). 이 질문에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9:5). 이 말씀 앞에서 사울은 변했습니다.
그때부터 사울은 예수를 주로 부르고, 예수를 주로 증거하고, 예수를 주로 섬기는 일생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울이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을 만나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사울의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눈을 떠서 보아야 하는 것은 ❷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삶의 진정한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무엇인지 모르게 삶이 답답한 이유는,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 순간 삶의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세요.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시력을 상실했을 때, 그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시력을 잃은 사울은 유다라는 성도의 집에서 사흘을 금식하며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명령을 받고 그곳에 도착한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볼 수 있도록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9:10-11절 말씀입니다.
사울의 눈을 멀게 하시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 눈을 다시 뜨게 해 주신 이유가, 사도행전 9: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하는 것.” 이 명령이 사울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사울에게 주신 사명은, 자신이 어둠에서 눈을 뜬 것처럼 복음으로 이방인들도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행 26:16. 18).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속량해 주시면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은혜가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확실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시 눈을 떠서 보아야 하는 것은 ❸주님께서 동행하시고 보호해 주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을 묵상할 때마다 깨닫는 것은, 모험을 감수하지 않고 믿음의 선진이 된 사람이 한 분도 안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험은 항상 힘이 들고 어렵지만, 신앙인들의 모험에는 언제나 주님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심 그리고 보호하심의 약속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20 말씀을 묵상하시고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사도행전 9: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 9:20).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사울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즉시로 전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새로운 눈을 뜨는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서 세상만을 바라보게 했던 비늘 같은 것이 내 눈에서 벗겨지면, 그래서 예수의 말씀이 들리고 나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신 살아계신 예수의 모습이 보이면, 그리고 그분이 영생을 약속하신 것을 믿는다면, 담대하게 그분을 전할 수 있습니다.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새로운 눈을 뜨고 주를 전하는 그 길에는, 언제나 핍박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하는 삶에는, 늘 미움과 핍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는 그 삶에는 약속하신 주님의 보호하시는 손길과 동행해 주시는 은혜가 항상 있습니다. 변화된 사울의 삶에 모습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행 9:22-25).
주님께서 이렇게 사울을 보호하신 것은, 그가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의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당신께서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울처럼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온 힘을 다하여서 감당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을 때, 주님께서 동행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Nov 16,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감사를 잊지 않은 사람
(누가복음 17:11-19)
주원영담임목사
성경에 기록된 단어 중에서 반복해서 기록된 단어들이 많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기억하라는 단어(시 103:2)와 잊어버리라는 단어(사 43:18)가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을 통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만나 치료함을 받은 열 명의 한센병(나병) 환자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치료함을 받은 열 명중 오직 한 사람만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 사람만이 감사를 잊지 않았다는 말입니다(눅 17:15-16). 그리고 이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눅 17:17). 치료함을 받은 열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만 감사를 잊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감사를 잊지 않은 이 사람을 통하여, 감사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배우려고 합니다.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❶과거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감사를 잊고 사는 모습은, 과거를 망각하게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센병(나병)에서 치료함을 받은 9명의 모습 속에서 과거를 망각한 삶의 모습을 봅니다.
저들이 한센병(나병) 환자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모와 불행한 과거를 기억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감사를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만이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눅 17:18).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함께 예배를 드리는 내 모습이, 그 아홉 사람 중에 있지는 않을까요?
평생을 감사하면서 살았던 모범적인 사람중에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사하면서 살았던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삼하 7:18). 다윗이 평생을 감사하면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의 과거 모습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가난한 목동으로 고생했던 그 과거를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근본적이고 영적인 과거를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엡 2:11-12). 바로 지난날의 우리의 모습이 바울 사도가 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❷현재의 감동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영성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우리의 지난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끼는 감동을 붙잡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열 명의 한센병 환자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고 순종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과 순종이 저들의 한센병(나병)을 치료했습니다(눅 17:13-14).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제사장을 만나러 길을 가는 중에 깨끗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홉 명에게도 감사해야겠다는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의 한 사람은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자신의 한센병이 치료된 것을 보는 순간 걸음을 돌려 곧장 예수님께 달려 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의 영성으로 살아가려면 현재의 감동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감화하시고 감동하시는 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❸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수 있는 내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현재를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수 있는 미래가 주어집니다.
치료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 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9). 육신의 질병을 치료해 주신 것을 감사했더니, 그의 영혼의 구원까지 보장하여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감사는 미래의 축복의 여는 열쇠입니다. 오늘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 미래를 열고자 하신다면, 멋진 감사의 제단을 쌓으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멋지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지난 시간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감동으로 오늘도 천국의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생각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Nov 9, 2024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옥합을 깨뜨린 여인
(마가복음 14:3-9)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이 일어나던 상황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고 뇌성이 울리던 밤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막1 4:1-2).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종교인들이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던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감사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 3절은 이 사건을 “한 여자의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12:3절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을 마리아(나사로의 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마가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헌신은 숨겨질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주님께서는 친히 옥합을 깨뜨려 감사를 드린 이 여인을 하나님 나라 역사의 가장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된 헌신과 참된 감사는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요?
❶할 수 있는 곳에서 드려야 합니다(막 14:3).
성경은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을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나병환자였던 시몬이 예수님에게 치료함을 받은 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때의 모습을 마가복음보다 조금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요 12:1-2). 그리고 이어지는 3절 이하에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마리아의 헌신이 소개됩니다.
성도 여러분.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잔치가 시몬의 집에서 준비한 “예수님을 위한 잔치”였다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서 치료함을 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한 잔치입니다. 그리고 이 식탁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려주신 나사로도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저들처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아낌없이 드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❷할 수 있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마리아는 무엇으로 감사할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이 간직해온 옥합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마리아가 간직했던 이 옥합 속의 향유는 그녀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전부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향유의 가치가 300데나리온 이상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평범한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으니까, 이 향유는 일반 근로자의 일년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그렇게 큰 돈이었음에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옥합에 담겨져 있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사람들 중에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막 144).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6). 주님께서는 이 일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기억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성도 여러분. 우리도 드릴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드림으로 주님께서 기억해주시는 은혜를 맛보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❸할 수 있는 때에 드려야 합니다.
1절 말씀을 보니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린 때가 언제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십자가를 지시기 9일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께 그날 이 사랑의 헌신을 드리지 못하고 주님의 임종의 소식을 들었더라면,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다행히도 이 기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이때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막 14:8).
성도 여러분. 봉사하는 것도, 헌신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을 드렸습니다.
마리아처럼 할 수는 없을지라도, 드릴 수 있는 곳에서, 드릴 수 있는 것으로, 드릴 수 있을 때에 드릴 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부족하지 않고 차고 넘치게, 그리고 풍성하게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마리아가 드렸을 때에 그의 드림이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기억되었듯이, 우리의 드림도 주님께서 기억해주시는 드림이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이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성도님들의 삶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