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Oct 5, 2025

섬김이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3:12-17)
주원영담임목사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종교를 가지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은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2차 전도여행 중에 잠시 머물고 있었던 아덴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아덴 사람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 17:24-25).
그리고 보니 우리들의 조상들도 그랬습니다. 비가 안 오면 천신께 기우제를 드리고, 고기를 잘 잡도록 그리고 바다에서 사고나지 않도록 바다의 용왕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하고 나면 풍성한 수확과 추수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하늘에 계신 천신께 드렸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은, 그 옛날 아덴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제사(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분께 제사를 드리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섬김의 왕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선지자로 ◎자신을 몸을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로 드리신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람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영광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참고 기다리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지금도 우리들을 섬기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힘이 있고 권세가 있는 사람이 섬김을 받습니다. 부유하고 가진 것이 풍부한 사람이 대접을 받습니다. 능력이 있고 학력이 있고 명예가 있으면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주인이시며 부족함이 없고 능치 못함이 없으신 그분께서는 우리를 섬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섬기셨습니다. 그 어떤 이유도 없이 겸손하게 섬기셨습니다(마 20:28).
그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섬기시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감사뿐입니다. 감사드릴 것 밖에 없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그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드리는 작은 감사를 보시고 더 큰 것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려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큰 섬김을 보여주셨음에도, 그분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품어주시고 안아주셨습니다. 위로해주시고 함께 울어주셨습니다. 섬김이 무엇인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기억하시면서, 주님의 가르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하나님이신 그분께 늘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에게서 섬김의 모습이 보여질 때, 생각하지도 못한 하늘의 축복이 임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 땅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섬김의 축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이 됩니다.
살아가시는 동안 섬기는 모습이 보여지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누가가 전한 복음을 기억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 17:25).
그래서 우리가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그리고 이 감사는 바로 우리들의 “섬김”입니다. 섬김은 예배입니다. 섬김은 봉사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섬김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섬김은 축복입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고, 늘 섬김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으로,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Sep 28, 2025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
(창세기 39:19-23 )
주원영담임목사
중세시대 베드로 대성당을 수리한다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던 로마교황청의 대단한 권력 앞에 서 있었던 루터를 생각하던 중,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 요셉이 떠 올랐습니다.
당시 보디발은 거대하고 대단한 세력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창 39:20). 요셉은 분명히 왕의 죄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보디발은 왕의 죄수들만을 가두는 그곳에 요셉을 가두었습니다. 보디발의 힘은 왕의 권한까지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어쩌면 순순히 따르는 것이 요셉에게는 현명한 처세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요셉은 아니라고 외칩니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 39:8-9).
그는 눈앞의 보이는 사람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이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거절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거절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최초의 범죄도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질러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창 3:1-6).
그렇다면, 요셉은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 앞에서 어떤 다짐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요셉은 분명히 루터처럼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이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요셉의 결단으로 선택된 곳은, 자유함이 있는 보디발 장군의 집이 아니라,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변호해 줄 수 없고, 건져줄 수 없는, 왕의 죄수들만 가두는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그렇게 깊은 감옥에 갇혀 있으지만, 요셉의 삶은 하루하루가 기적이었습니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2-23).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곳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형통함의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곳을 관리하는 간수장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명을 쓰고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던 요셉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은 지금 말이 아닌, 온몸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했고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고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좀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말씀을 붙잡고 믿음을 가지고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장소에서도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기가 막힌 방법으로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의 삶이, 요셉과 같은 믿음의 삶이 되심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늘 황량한 들판에서 양을 쳐야 하는 기막힌 환경에 던져져 있었지만, 다윗은 이렇게 믿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또한,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 16:6). 이렇게 믿음으로 선포했던 다윗을 보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처럼 입으로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입술의 고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온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고백하고,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살펴보시고 계십니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십니다(시 139:1-4).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유익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시 138:8). 이전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시 138:8).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이제 우리도 루터와 같은 기도, 다윗과 같은 기도, 요셉과 같은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기도를 들으시고, 루터에게 주셨던 그 축복, 요셉에게 주셨던 그 축복을 우리에게도 부어주실 것입니다.
Sep 21, 2025

해결의 열쇠는 내 손 안에 있다
(사사기 6:11-18)
주원영담임목사
2,000년 전 갈릴리 해변에 인접한 벳세다 들녘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보기 위하여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모인 저들의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제자들은 모인 수 많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계실텐데, 고민하면서 걱정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4:1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 14:16).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너희들이 알고 있다. 그 방법을 너희가 가지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덩이로, 남자(장정)만 5,000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마 14:20-21). 마태복음 14:20-21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마 14:20-21).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다 준 주님의 말씀인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는 주님의 이 메시지가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울림으로 다가옵니까?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드온이 살고 있던 때에, 매년 파종때가 되면 메뚜기 떼와 같이 수 많은 미디안 군사들이 국경을 넘어와서는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매년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이 무서워서 산속에 토굴을 파고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이라는 청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삿 6:12). 이어지는 말씀이 특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삿 6:14). 너의 힘으로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너 기드온이 가지고 있다고 말씁하십니다.
기드온이 가지게 된 것은, 삼백 명의 백성들과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횃불이 전부였습니다. 이것이 메뚜기 떼 같이 많은 대적들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지만 기드온은 14절에 기록된 “이 너의 힘으로.” 이 말씀을 붙잡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담대히 대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삿 7:18).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문제에 직면(直面)했을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세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와 함께 열쇠도 주신다는 교훈입니다. 그 열쇠가 사람일 수도, 사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그 어떤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내 가까이에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니 지금 내가 내 손에 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열쇠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는 교훈입니다.
이 같은 교훈은 성경 여러 곳에서 일관(一貫)되게 나타납니다.
◎아람나라에 나아만이라는 군대장관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었는데, 포로로 잡혀와 시중을 들고 있었던 바로 어린 여종이었습니다(왕하 5:2-3).
◎목동인 다윗이 전쟁터에서 블레셋의 장군인 골리앗과 마주섰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가지고 있는 문제 해결의 열쇠는, 평소에 양을 치면서 사용하던 막대기와 매끄러운 작은 물맷돌이었습니다(삼상 17:40).
◎살인죄를 저지르고 도망하였기에 지명수배를 받았던 늙은 목동 모세를 아시지요. 그가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내기 위해 바로와 맞서야 했을 때, 문제 해결의 열쇠는 그가 손에 쥐고 있었던 작은 지팡이였습니다(출 4:2.7).
◎엘리사 시대에 남편과 사별하고는 빚을 떠안고 협박을 당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삶이 너무나 힘들었을 때 엘리사와 나눈 대화를 통하여 얻은 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기름 한 그릇”이었습니다. (왕하 4:4:2-4).
나아만에게, 다윗에게, 모세에게, 선지자의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해결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문제와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열쇠는 내 가까이에 있습니다. 아니 내 안에 있습니다. 이미 내 손에 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눈에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문제와 함께 문제를 해결할 열쇠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문제 해결의 열쇠는 내 가까이에 있습니다. 아니 이미 내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이 진리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0:13).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7). 이 말씀을 믿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힘써서 간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쇠가 보입니다. 평소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이 너의 힘으로 (삿 6:14).” 이렇게 보입니다.
간절히 소원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열쇠를 발견하고 능력있게 사용함으로, 기드온처럼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주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4:13절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 은혜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Sep 14, 2025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
(신명기 28:7-14)
주원영담임목사
하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는 성도님들을 축복합니다. ◎성도님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에도 하늘 문이 열려지는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고통과 저주의 시간들은 이제 저와 성도님들의 삶에서 닫혀지고, 하늘의 문, 축복의 문이 열려지는 축복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28장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축복과 저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12-1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 28:12-14).
12절에 기록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라는 표현은 “하늘 창고”를 말합니다.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겠다는 것은, 하늘 문을 열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물이 가득 쌓여있는 하늘 창고를 열어주시기만 하면,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바로 신명기 28:3-6절에 약속하신 복입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3-6).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기만 하면, 우리의 인생은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축복으로 삶이 변화됩니다. 삶의 어려운 일들도 모두 해결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신명기 28:7-10절 말씀을 보세요.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장마비와 같은 축복입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에게, 그리고 부족한 종의 가정과 영원한 교회 위에, 이 축복이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하늘 문은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에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두 분류의 무리가 하늘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사건이 그렇잖아요(왕상 18장).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열쇠는 신명기 28:1절과 13-14절입니다. “그의(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이것입니다. 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하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순종은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의 기준을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먼저이고 내 뜻은 그 다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주어이고 하나님을 목적어였습니다. 하나님을 내 꿈과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모습은 순종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순종은 “나”라는 주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만을 진정한 주어로 삼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예”만 합니다. 사람의 말에 “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예”하면서 순종합니다.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고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순종하는 태도가, 하늘 문을 열게 하는 열쇠를 가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을 선언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고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히 11:6).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순종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이제 다시 순종하겠다고 결단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하겠다고 결단하는 자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축복이 입합니다. 이 축복이 성도님들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