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설교 요약

Dec 14, 2025

신앙은 기다림이다
(베드로후서 3:8-13)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은, 왠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희망적이고 기쁜 말씀이라는 느낌보다는, 이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것 같은 무거운 느낌을 주는 말씀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함께 말씀을 생각하는 동안에, 진정한 기다림의 기쁨과 은혜를 경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성경에서 교훈하시는 신앙적인 기다림이 있지만, 우리의 삶에서도 여러 모양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다림들은 언제나 성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기다림도 경험하게 되고 행복을 주는 기다림도 경험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는 기다림의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었던 땅과 아비와 친척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떠난 후의 아브라함의 삶은 기다림의 삶이었습니다.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얻고 난 후에 그의 후손들은 또 400여 년을 기다렸고, 출애굽과 광야생활 40년을 더 기다리면서 훈련의 시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기다리는 그 시간동안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노아도 그랬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방주를 지으며 무려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마도 그는 기다림 때문에 지친 삶을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날은 홍수와 함께 왔고, 기다리며 준비했던 노아의 가족을 죽음을 면했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매일처럼 양을 치고 있던 어느 날,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15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목동의 신분으로 양을 치면서, 사울 왕을 피하여 광야로 이웃나라로 도망하면서 기다렸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 무척이나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8-9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이 말씀을 기록할 때는,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던 시대였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악인들이 흥하였고 죄가 판을 쳤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임하지 않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악이 이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고통의 시간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탄생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지만,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기간이라는 이 진리를 잊지 않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희망이고 힘을 얻는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입니다. 이사야 40:31절 말씀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기록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을 영어 성경 KJV은 “주를 기다리는 것(Wait upon the Lord)”을 말합니다. 지루함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릴 때 새 힘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본문 8절 말씀은, 이해는 잘 되지 않지만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시편 90:4 인용).

이 말씀은, 우리가 기다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날수를 계산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신데, 나에게는 현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수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시각에서 생각해 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계산법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은 조급하게 생각하거나 조급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 모두에게,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축복이라는 진리를 본문 10-13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

성도 여러분. 기다림은 우리가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믿음과 기쁨으로 고대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기다림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고난의 시간일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저 기다림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3절 말씀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새 하늘과 새 땅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축복들을 조급해하지 마시고 기다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11-12절에서 이 진리를 말하면서 기다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벧후 3:11-12).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경건”은 내적인 모습을 말합니다. 그런데 경건의 사전적 의미는 “공경하고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하는 모습”입니다. 경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금욕을 요구합니다.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는 율법적 규범이 경건으로 이해되면서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경건을 다 지킨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인 삶의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야고보서 1:26-27절 말씀이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 1:26-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11절에서 말하는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잘못된 경건의 이해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5).

경건은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섬기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나를 지키는 거룩한 행실과 함께,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봉사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야로 오신 성탄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과 같이 경건의 삶을 실천하실 수 있는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ec 7, 2025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마태복음 5:9)

주원영담임목사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8가지 복은, 잘 사는 복이 아닙니다. 성공하는 복도 아닙니다. 이 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복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균형 잡힌 삶의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이 여덟 가지의 복을 한마디로 “화평을 이루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7번째 복이 “화평을 이루는 삶”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예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평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시간동안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하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식구 중에 한 사람이 병으로 아파보세요. 회사가 먼저인가요? 학교나 학원이 먼저인가요? 여행이나 약속이 먼저인가요? 아니잖아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화평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었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지었기에 아름다운 교제의 관계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아갈 때마다 제물을 들고 찾아갔고, 그 제물을 드리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신약시대에는 피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짐승을 죽였습니다. 죄 없는 양들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안타까워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양을 잡아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화해의 제물로, 회복의 제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화평”이라는 단어의 근복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화평을 이룬 사람이 “예수”라고 우리에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 화평을 위해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완벽한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동안 휘장으로 가로막혀있던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평화의 왕”이라고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사 9:6). 누가복음 2:14절 말씀과 요한복음 14:27절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평화는, 내가 주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완전한 평화의 모습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질 때, 그때 나에게도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영적인 평화는 물론이거니와 육신의 평화도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진리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화평은 ◉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죄가 사람을 사정없이 얽어맵니다. 불안하게 하고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죄가 사람을 얽어매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강한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화평은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면, 나 자신과의 화평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불화하면 내 마음도 내 영도 내 삶도 불화하게 됩니다. 그 삶은 지옥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도 내 영도 평화롭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것이 나 자신이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화평은 ◉모든 관계에서 화평을 나누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죄가 나를 짖누르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집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 사람은 누구와도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화평을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화평을 위하여 오신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갈등의 요소를 줄여야 합니다. ◎화해를 했으면, 찾아가야 합니다(마 5:23-24). ◎상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대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모습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내 자존심과 내 자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족간의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자존심의 그늘 안에 갇혀서 관계의 소중함을 모르고 갈등하며 살아가게 되면, 마침내는 하나님도 떠나고 주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화평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등을 줄이면서 말입니다. ◉찾아가서 화해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가를 치르어야 하면 댓가를 치르면서 말입니다.

이 모습이 화평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만왕의 왕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마음에 깊이 새기시고, 이 일을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Nov 30, 2025

위로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
(이사야 40:1-8)

주원영담임목사

 우리가 해마다 성탄을 맞이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성탄의 의미를 어떻게 마음에 새기고 계십니까?

아마도 성도들에게는 내 마음과 내 인격과 내 생활이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

어떻게 위로해야 합니까?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참 지도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진정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지만,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40:5). 메시야적 대망(Messianic Expectation)입니다. 메시야가 참 소망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종말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말론적 신앙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이사야 40: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사 40:9-10). “아름다운 소식(사 40:9)”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장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사 40:10).” 이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또한 복음의 핵심은 “사죄”입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40: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사 40:2).

믿는 사람들은, 가장 큰 사랑인 “용서”를 복음의 핵심이라고 외치야 합니다. 밝은 소망이 메시야의 세대에 임할 것을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메시야의 오심이, 바로 용서의 시대가 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 앞에서,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하면서 미래를 말합니다. 이러한 시시비비를 통해서는 절대로 미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를 청산해야 미래가 보인다고 하는데, 과거를 청산할 길이 없기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멀리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초월하여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사모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습이 진정한 성탄을 준비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더라도 그것들을 들추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없었던 것으로 여겨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바로 이 모습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드리는 준비된 자세를 성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온 것은 실낱같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대해 주실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나는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말입니다(눅 15:21).

아들의 생각은 당연합니다. 머슴의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라고 하면서 잔치를 베풀라고 종들에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24).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하나만을,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로 생각하십니다.” 이렇게 말한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외아들처럼, 외동딸처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엄청난 사랑을 받아들이고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 진리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이신 오실 예수를 영접하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낮아지고,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오시는 주님을 올바로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겸손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마음을 비우시고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골짜기가 높아지게 됩니다. 믿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만 하시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아들이라고 불러주시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딸이라고 불러주시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딸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확실한 주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 40:3).

굽어진 마음과 편견과 오해들을 다 지워버리고,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모습이 성도의 자세입니다(Acceptance). 성탄을 준비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힘듭니까? 왜 이렇게 어려운 겁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위로는, 죄 사함에 있고, 참 사랑에 있고, 그리고 만나주심에 있습니다. 그 위로를 주실 그분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대신 담당해주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참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위로를 받아들이는 길은,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새로운 소망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Nov 23, 2025

교회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
(마태복음 16:13-20)

주원영담임목사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는 역사 속에서 잘하기도 하였고 잘못하기도 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과 같은 교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던 때는 없었습니다. 빛과 같은 교회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도 그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세상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때로는 주님의 기대와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교회의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예수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나의 교회(My church)”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 시간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를 생각해 보면서 다짐하려고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함입니다(눅 19:10).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 베드로와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하자, 이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한 사람의 헌신에서 교회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마 16:18).

교회에 많은 성도가 모인다는 것은,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있다는 것이지만, 이 모습만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닙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적은 성도일지라도 진정으로 헌신된 성도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으시고,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성도님들의 인내를 쌓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자신있게,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저도 끝까지 참석했다고 큰 소리로 말씀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교회를 세우시고자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다고 증거합니다(엡 5:25).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0:28절 말씀에서 교회를 가르쳐 “자기 피로 사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교회에서,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당신께 기도를 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나님의 성전을 지켜주시는 분들입니다. 많은 성도가 예배를 드리거나 한 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거나 관계없이 예배를 사랑하고 예배 속의 모든 사역에 함께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진실한 희생을 드리시는 분들입니다.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교회는 이런 분들에 의해서 지켜지고 세워지고 그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사랑하는 비결은 단순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위하여 희생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셨다면 주님께서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이 모습을 기쁘게 보시고 주님께서 힘을 주실 것입니다. 희생할 수 있는 결단을 주실 것입니다. 공동체의 주인의 모습인 헌신자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문인로 57 삼풍동 상가 302호

​온라인 헌금

​신한은행 140-011-881970

​예금주:대한예수교장로회 영원한교회

전화번호

031-262-2674

 EMAIL

​예배시간안내

주일예배         1부   오전 11:00

                       2부   오후   2:00

수요찬양예배           오후   7:30

금요기도회              오전 11:00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5:30​

© 2024 영원한교회 l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