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Aug 10, 2025

믿음의 도전이 주는 축복
(마태복음 14:22-33)
주원영담임목사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 베드로가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갈릴리 바다를 아무런 장비도 없이 걸어가겠다고 합니다(마 14:28). 무모해 보였지만, 물 위로 발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이내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생각할 때, 실패한 사건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그의 저서 “물 위로 걸으려면 단순하게 믿으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독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배 안에서 배 밖으로 나오는 모험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비록 잠시지만 그가 물 위를 걸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택은 베드로의 몫(우리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모험이,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런 모험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모험은 ◎순종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영웅심에서 그 모험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라고 명하시면 기쁨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마 14:28). 주님의 명령이면 순종하겠다는 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험이 세상 사람들의 모험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를 능력의 주님으로 확실히 믿기에,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모험을 할 때, 그 기준이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모험은 ◎믿음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에 이름을 올린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모험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물 위로 발을 옮긴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모험을 시작한 것입니다(마 14:28-29).
그러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다고 기록했습니다(마 14:30). 순간 그는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믿고 행했기 때문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그 모험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한 모험이었습니다. 결괴적으로 실패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완전한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믿음을 잃어버리고 물속에 빠진 베드로를 주님께서 건져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하지만, 이런 모습을 통하여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더 성장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베드로에게 이날의 경험은, 부분적인 실패를 통하여 더 큰 믿음의 모습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험 앞에서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철저하게 점검하고 믿음으로 행하십시오. 그리고 그 모험의 기준은, 순종의 모험이고 믿음의 모험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모험에 함께 하시고 기적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 속에는 중요한 두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잠간동안이었지만 베드로는 인류 최초로 물 위를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을 잡아주신 주님께서 배 위로 오르시자마자 신기하게도 바람이 그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가 모험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경험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바로 이 경험이 모험을 선택한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순종을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경험을 했습니다.
이 상황을 마가복음 6:48절에서는 조금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지나가려고 하시매(παρέρχομαι. 파레르코마이).
주님께서는 지금 한 밤중에 갈릴리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며 고생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맞은편 산에서 보고 계시다가, 도와주시려고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신앙의 상식으로 당연한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내니.” 이 말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는 현재이다(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말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물 위를 걷다가 물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구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치셨습니까? 낙심이 되는 일이 있으십니까?
다시 한번 신앙의 모험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그 모험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를 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내 손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힘들었던 모든 환경들까지도 잠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성도님들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ug 3, 2025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
(에베소서 2:8-10)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 2:10절 말씀을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엡 2:10).”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포이에마”라고 기록하였습니다(만드셨다. 작품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의 독특한 “예술적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창조주의 “걸작품(masterpiece)”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걸작품이 대단합니다. 100조개의 세포 조직, 25조개의 적혈구, 250억개의 백혈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지구상에는 약 70억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 모든 사람들의 지문이 같을 가능성은 640억대 1이라고 합니다.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쉴 새 없이 좌절하고 넘어지며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걸작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❶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으면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지어진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걸작품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게 되고, 타락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회복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회복의 첫걸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걸작품다운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는 방편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공로나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엡 2:8-9).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처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바로 이 모습을 본문 10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엡 2:10).
구원의 확신이 없으시거나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시면, 먼저 믿음으로 거져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걸작품 인생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걸작품 인생으로 살아가려면 ❷창조주의 선한 기대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창조주의 선한 기대를 따라 살게 하려 함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본문 8-9절에서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열매인 선한 행함이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에베소서 2:8-9절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혜+믿음=구원+행함. “은혜+믿음-행함=구원”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뭔가 조금 부족한 생각입니다. 구원의 열매로 나타나는 선한 행위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에,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죄를 안 지을 수 있는데 지었다는 말은, 그 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악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선을 행할 능력이 생겼습니다. 이 희망이,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모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엡 2:10).
걸작품 인생으로 살아가려면 ❸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그 기대를 실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드려지기 위하여 우리를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두셨다고 말합니다(엡 2:22).
인생이 혼자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대를 이룰 수 없기에 아담에게 돕는 베필을 주신 것과 같이, 우리를 더불어 사는 인생이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가정만으로는 성취하기 어려운 더 큰 선을 이루시고자 하나님께서는 더 큰 영적가족을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엡 2:19). 그래서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붙들어 주고, 함께 세워주고,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며, 서로의 인생이 걸작품이 되도록 돕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선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모임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작은 모임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교제를 통하여, 울고 웃으며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하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추구하는 걸작품 인생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향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공사 중인 건물 곧 성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지만 공사를 진행하는 모든 과정이 다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고의 위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질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인내하며 세워주고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공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그날을 소망하며 인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불평하는 대신 서로를 세워주고 스스로를 세워가는 기쁨으로 날마다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세워가는 공동체로 인하여 기쁨을 나누고 감사를 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Jul 27, 2025

주님을 만나면...
(요한복음 4:27-42)
주원영담임목사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면 변화됩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나와 우리들 앞에 보여지는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체험이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이 은혜를 경험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수가성에 살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끼니를 해결하기 위하여 빵을 사러 동네로 들어간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관습으로는 랍비가 여인과 단둘이 공개적으로 만나는 것은 부적절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더 놀랐던 것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천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셨을텐데, 지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고 계시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이내 동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요 4:28).
하지만 예수님과 잠깐의 대화를 나눈 이 여인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➊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내로 들어갑니다.
여인이 우물에 온 목적은 물을 긷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갔습니다. 이 모습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삶 속에서 정말로 예수님을 만나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를 향하여 달려간 것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모두 바뀌게 됩니다. 세상의 것들만을 위하여 살아왔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동네로 들어간 후에는 ➋자신이 만난 사람이 메시야임을 믿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선지자라고 합니다(요 4:19). 내가 만난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요 4:29). 그리고는 와서 보라고 외칩니다.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거리로 삼는 것을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 만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피해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만난 후에 그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예수를 만났던 이 여인처럼,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만나서 전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➌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수가 오실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지성인이며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성숙했던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진리를 찾기 원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에 천박하며 그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사마리아 여인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말씀을 통하여 변화를 받았으며,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붙잡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4:30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 4:30).
사마리아의 수가성 사람들이, 이 여인이 전한 한 마디의 단순한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평소에는 그 어떤 사람도 이 여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여인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내가 수가성 여인처럼 보잘것 없은 그런 사람일지라도, 정말로 예수님을 만났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선포하면, 사람들은 듣습니다, 믿습니다, 나아옵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그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우리의 말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감격을 전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속에서 중요한 진리 하나를 깨닫습니다. 그것은 “성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중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십니다(요 4:42).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소개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사이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가 31-32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대화가 너무나도 다릅니다. 관심사가 다릅니다. 제자들은 보이는 육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영혼을 채우는 영원한 참된 양식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참된 양식”이란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여인에게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관점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하는데, 자꾸 현실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을 봅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잘 아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실천하시는 교회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가성 사건이 있은 후에 주님께서는 하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의 비전을 말씀하십니다.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요 4:35-36). 이것이 나의 비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는 씨를 뿌리는 수고는 하지 않았지만, 추수 때에 동참하기만 하면 상급과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씨를 뿌렸기 때문에, 이제 추수꾼의 자격으로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요 4:37-38).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비전이 품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얻기 위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이와 같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늘의 풍성한 은혜와 놀라운 축복을 풍성하게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Jul 20, 2025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때
(로마서 5:5-8(1-11))
주원영담임목사
살아가다 보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계약과 같은 중요한 약속 말입니다. 약속할 때 가졌던 기대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불순한 동기로 맺은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착각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이 신실하다고 생각되면, 약속은 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약속이 깨어지면, 그 모든 원인과 책임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큰 깨우침을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소망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데, 그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6).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절대로 약속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너무 연약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함을 잃어버렸고 죄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와 약속을 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경건할 때만 약속하신 언약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건하지 않았을 때도 지키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때면, 보아야 할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책임 전가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시면 아담이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질책하자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가 하나님께 있고 하와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 최초의 살인도 같은 동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그 원인을 아벨에게서 찾습니다. 순간 형제의 관계는 깨어지고 가인에게서 분노가 시작되었고 결과는 살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실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임에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소망을 놓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롬 5:5). 바로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김으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7:1-2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어떤 민족과도 언약을 맺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9장에 보시면, 어느 날 신분을 속이고 한 무리의 유목민들이 여호수아를 찾아옵니다. 화친 조약을 맺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뜻을 묻지 않고 화친을 맺습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 9:14).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에 그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했기에 무효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기브온 족속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주변 국가의 왕들이 연합하여 기브온을 공격했고 여호수아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개입했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해와 달이 하늘에 멈춘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수 10:13-14).
만일 여호수아가 기브온 거민에게 속아서 체결한 언약이라고,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고 언약을 지키지 아니했더라면, 결코 이와 같은 놀라운 경험은 없었을 것입니다.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는 놀라운 기적과 축복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식언)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말이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민 23:19. 14:28). 다윗도 말합니다(시 15:4).
이와 같은 모습을 본문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가치가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데, 아직 죄인인데, 언약을 깨뜨리고 내 갈 길로 갔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과거의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숨기면서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 한 부류는, 과거의 상처를 거울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멋진 흔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훈장처럼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라는 것은, 성도님들의 시간이 지난 시간들을 후회하는 시간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을 기대하는 시간으로 시작되는 오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도님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는 한 번도 틀린 경우가 없습니다. 늘 한결같으셨습니다. 단지, 나를 향하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를 잊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성도님들에게 설교의 제목으로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주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었습니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4-15).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나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