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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약

Feb 8, 2026

먼저 가야 할 곳, 브엘세바.
(창세기 46:1-4)

주원영담임목사

성도님들께서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담대하게 순종하면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으십니까?

어느 날 야곱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다녀온 아들들을 통하여, 사랑했지만 죽었다고 알고 있던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말입니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야곱은 확신을 가지고 죽기 전에 아들 요셉을 보겠다고 말합니다(창 45:28). 가산(家産)을 다 정리합니다. 70여 명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130세의 나이에, 그 먼 곳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는 결정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결정합니다. 아들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믿음의 사람 야곱의 발자취를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유는,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길을 떠났지만, 야곱은 곧바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브엘세바에 먼저 들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창 46:1)

분명한 것은 브엘세바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지 않았습니다. 브엘세바는 광야에 있는 동네였습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의 몸종 하갈이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났던 곳입니다(창 21:14.16).

그런데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다가 브엘세바를 찾습니다. 그곳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브엘세바로 가족들과 소유물을 모두 이끌고 나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이 온 가족을 이끌고 왜 브엘세바를 먼저 찾았다는 말씀 속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창 46:1). “이르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먼저 그곳에.”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향하여 일부러 나아갔다는 말씀입니다. 브엘세바를 들르는 것을, 아들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데,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과는 방향도 다른 곳인데, 야곱이 왜 이곳을 먼저 찾았을까요?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에 응답을 받은 곳입니다(창 21:33).

아브라함과 사라의 평생의 제일 간절한 소원은 아들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쫒아냅니다. 바로 그곳이 브엘세바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장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에 에셀나무를 심었고, 그곳에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기도가 있었고,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고, 아비멜렉과 언약이 있었던 그곳이 브엘세바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이삭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입니다(창 26:23-25).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넓고 복된 장소인 르호봇에 이삿짐을 푼 그날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밤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브엘세바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야곱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 옛날, 형 에서에게서 팟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후에 도망쳐야 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먼저 찾았던 곳이 브엘세바였습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기도의 응답을 받은 곳이고,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그래서 도망해야 하는 급한 상황임에도 그곳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바로 그곳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야곱을 만나주셨고, 야곱의 가는 길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잊지 못할 경험을 한 장소가 바로 브엘세바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엘세바는 단순히 브엘세바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기도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입니다.

지금 야곱은 대단히 중요한 인생의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과연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 길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지를 묻기 위하여 자기 생각과 계획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먼저 브엘세바를 찾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앞에 놓고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삼하 2:1).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 성 전투 때, 기브온 거민들을 만났을 때.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고난의 시간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곱은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길을 물었습니다(창 46:1). 짐승만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길을 물었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6:2-4).

성도 여러분. 애굽은 우리의 원하는 목표이고 꿈이고 희망일 수 있습니다. 의식주가 해결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곳 애굽보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위하여 자신의 언약의 맹세의 축복을 이루어 주셨던 특별한 장소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곳,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브엘세바를 찾기만 하면, 하나님의 전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십니다. 말씀하십니다. 만나주십니다.

우리들은 매일 똑같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하루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냥 적당히 세월이라는 돛단배에 몸을 싣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의미 있는 날들을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시간이 되고, 이 시간에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Feb 1, 2026

왜 길갈로 돌아왔을까?
(여호수아 10:12-15)

주원영담임목사

 박광수씨가 “광수생각”이라는 책에 이어 “야구생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나는 야구에서 인생을 배운다”는 부제목도 달렸습니다. 저자는 책을 통하여 “야구는 시작하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경기이듯이 인생도 돌아오는 삶이다.” 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 옛날 에덴동산에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돌아와야 하는데 돌아오지 않고 도망하여 숨어있는 아담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성도된 우리들은 인생의 삶을 살다가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여호수아 10장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 (수 10:15.43). 이 말씀은 여호수아서에 여러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점령했습니다. 북쪽 땅을 점령하였고 남쪽 땅도 점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손에 넣었는데 그 일을 시작한 “길갈”로 돌아옵니다.

저들의 이와 같은 이상한 행동이, 오늘을 살아가도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지난날 길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길갈은 ◉요단강 바닥에서 가지고 온 “열두 돌을 세운 곳”이었습니다. 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수 4:19-20).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길갈로 돌아왔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한 평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했고 이겼지만, 그것들을 미련없이 놔두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갈갈은 ◉출애굽 2세대들이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수 5:2-3).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자들 중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5:9절 말씀과 같이, “애굽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는 뜻으로 그곳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바로 그곳이 길갈입니다.

그러므로 길갈은 “회개의 장소”였습니다. “성결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장소”였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길갈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저들이 모두 길갈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길갈은 ◉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지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수 5:10-11). 길갈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킨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대로 감사의 예식을 지킨 곳입니다. 바로 그 장소가 길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고 또 돌아오고 또 돌아왔던 길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성결함을 고백하는 회개의 장소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장소였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회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감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함께 길갈로 돌아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도 길갈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길갈을 멀리해서는 안됩니다. 멀어져 있다면 반드시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갈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장소, 회개의 장소, 감사의 장소가 바로 길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귀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쫒기면서도 예배의 장소를 찾았던 것을 우리가 일고 있습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곳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례를 행하였던 회개의 장소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죄악이 넘치는 이 땅에 살고 있기에 죄악의 먼지 속에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이 주는 죄의 이 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합니다. 이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면서 주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 24:3-4절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참았습니다. 참고 그곳 길갈에서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도 감사의 장소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613가지의 율례와 규례들을 받아가지고 내려옵니다(출 20-34장). 그런데 613가지 율례 중에 제일 마지막에 주신 말씀이 바로 감사절을 지키라는 율례입니다. 감사는 제일 마지막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한 번만 감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늘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때로는 감사할 것이 없어서 감사하지 못한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신명기 26:3절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신 26:3).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하는 것이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수아가 길갈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회개의 장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장소였던 길갈을 기억했습니다.

기억하고 감사했더니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하게 해 주시고 가나안 족속을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태양이 머무르고 달이 멈추는 그런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Jan 25, 2026

사랑하라는 새 계명
(요한복음 13:34-35)

주원영담임목사

함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 중에는 6·25 전쟁을 경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중의 있었던 사건들 중에서 1·4후퇴(1951.01.04.)를 경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피난선이 떠난 “흥남부두의 이야기”는, 우리 어른들의 가슴속에 뼈저리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중에, 피난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흥남부두에서 미군이 제공한 배를 타려고 아우성하였고 수 많은 사람들을 태운 배는 우여곡절 끝에 부두를 출발했습니다. 부둣가에서는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통곡합니다. 배를 타지 못한 것이 곧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떠나가는 배에서는 찬송 소리가 들립니다. 그 찬송 소리는, 배를 탄 기독교인들이 “이제, 우리는 살았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 소리였다고 합니다. 성도님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신앙의 훈련도 많이 받았고, 성경적인 지식도 많이 싸였고, 교회생활도 모든 면에서 성숙했다고 하지만, 이웃을 생각하는 우리의 삶은 그리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라는 것을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서 알고 있지만,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안될까? 왜 말씀대로 그렇게 살지 못할까?” 그래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유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예수의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냄새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까지도 예수님의 사랑을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교인들을 무서워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 서로를 싫어하는 것은 다반사이고, 무서워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교회가 구원의 문제를 가르칠 때, 잘못 가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구원받는 조건은, 오직 믿음 밖에는 없다.”

예. 맞습니다. “믿음은 구원을 받는 필수조건”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저와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믿음처럼 구원의 필수조건이고 필수과목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선택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34절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이 말씀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만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에베소서 2:8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실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22절에서는 조금 다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에게 노하고, 욕하고, 업신여기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고, 사랑으로도 구원을 받는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표현은 틀리지만 믿음과 사랑은 같은 말입니다. “믿음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처럼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예수의 냄새가 납니다.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행위를 동반합니다. 믿음뿐만이 아니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정말 믿는다면, 반드시 동반되어 보여져야 하는 것이 있는데, 원수를 용서하는 모습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과 사랑은 쌍을 이루면서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34-35절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의 삶에서 이와 같은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보여질 때,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21-35절에서 10,000달란트를 탕감 받은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는, 돈의 가치를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것이 값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세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는,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고, 풀 한 포기를 보아도 하나님의 섭리인 것 같고, 만나는 사람들 모두를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불일듯했던 경험들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시간이 1년이 흐르고, 10년이 지나고, 2~30년이 넘어가면서, 은혜를 받았을 때의 그런 감격적인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짜증나고 화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변한 모습으로 어떻게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라고, 노력하라고 하셨으면 됐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다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주님이 되시고, 내 생명이 되시는 경우에만, 십자가의 사랑이 나를 통해서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냥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을 주시면서 영생을 주시면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짐을 함께 져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예수가 내 생명이 될 때, 용서는 결코 힘든 것이 아닙니다. 희생이나 손해도 아닙니다. 무거운 짐이 아니라, 놀라운 축복이자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계명을 마음에 새기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 새 계명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시면서,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an 18, 2026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사무엘상 7:12)

주원영담임목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교회는 평범하지 않은 말씀을 2026년 성도님들과 함께 붙잡고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나가려고 합니다. 사무앨상 7:12절 말씀입니다.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도움의 손길을 펼쳐주셨음을 경험했습니다. 돌아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던 중 문득 머리 속에 두 사람이 떠 올랐습니다. 한 사람은 “바르실레”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먼저 ◉“바르실레”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무엘하 19:3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시면 바르실레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르실레가 나이가 많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삼하 19:32).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 (삼하 19:35).

바르실래에 대하여 알려면, 사무엘하 15-19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반역이 평정되어 다윗이 다시 왕궁으로 귀환하는 이야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 왕을 왕궁에서 쫒아내는 반역을 일으킵니다. 다윗 왕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동문을 열고 도망합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를 지나 감람산으로 도망을 갑니다.

성경은 도망하는 다윗 왕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 15:30).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서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맨발로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자, 많은 사람들은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므비보셋의 종이었던 “시바”라는 자가 그랬고(삼하 16:1-4), “후세”라는 자가 그랬습니다(삼하 16:19). 사울의 친척이었던 “시므이”도 다윗 왕을 향하여 피를 흘린 자라고 사악한 자라고 돌을 던지면서 저주를 퍼붓습니다(삼하 16:5-8). 그리고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의 후궁들을 욕보이는 일을 서슴없이 행합니다.

왕이었는데, 아들의 반역 때문에 도망하고 있는 다윗 왕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그때 “바르실래”라는 사람이 “소비”와 “마길”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도망하는 다윗을 도와줍니다. 잠자리와 먹을 음식들을 가지고 다윗을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맨발로 도망하는 다윗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준 것입니다(삼하 17:27-29).

너무나 창피해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도망하던 다윗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이런 상황인데, 왕궁에 있던 압살롬은 지금의 후한을 없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도망하는 아버지를 지름길로 뒤쫒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아끼고 관리했던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이, 그만 상수리 나뭇가지에 걸렸고 나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신하 요압장군의 부하들에 의해서 나무에 매달린 채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압살롬의 반란이 평정되자 다윗은 왕궁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웁니다. 그때 다윗 왕은 제일 먼저 바르실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르실래를 불러서 말합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정정히 다윗 왕의 부탁을 사양합니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윗사람에게 음식을 차려드리다)하리라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삼하 19:33-34). 그리고 내가 갈 곳은 왕이 계시는 호화로운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말입니다(삼하 19:39).

참 아름답고 멋있고 감동이 있는 모습입니다.

바르실레는 부자였습니다(삼하 19:32). 그럼에도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가진 것이 있다고 거만하거나 잘난척하지도 않았습니다. 겸손했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줍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줍니다. 시대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올곧게 진실하게 바르게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바르실래가 머리 속에 떠 올랐고, 바르실래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들은 것입니다. 겸손했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바르실래처럼 살기를 소원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머리 속에 떠 오른 또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그의 형편은 이러했습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출 3:1).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모세의 귀에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호렙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분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마음으로 호렙산을 찾아갑니다. 기다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포기하지 않고 호렙산을 계속해서 돌고 돕니다. 아마 30년은 훌쩍 넘어 40년 가깝게 그렇게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었지만 모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산을 주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렙산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다른 나무나 풀로 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꽃 가운데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불에 타고 있는 나무 가까이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음성이 들리고 모세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4-5). 그리고 모세를 부르신 분이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나이 80이 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셨고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모세를 붙잡아 주시고, 그의 걸음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바로 앞에서 10가지 재앙들을 내리시는 기적을 보여주셨고, 홍해를 갈라주셨습니다. 아말렉을 이기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도 나타내셨습니다. 모세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걸음을 인도해 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르실래의 겸손한 삶의 모습. 모세의 충성된 삶의 모습. 이 모습들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펼쳐 인도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7:12절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그래서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영원한 교회와 성도님들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속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세웁니다. 특별히 “세운다”는 단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운다는 이 단어는 “만들다. 올리다. 구축하다. 짓다.” 이런 뜻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무엘이 입술로만 에벤에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돌을 세우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돌을 세운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세요. 제단을 쌓고.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12:7-8).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의 아들 이삭은 어떠했습니까? 거처를 옮겨가면서 우물을 팝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습니다(창 26:25).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의 아들 야곱은 또 어떠했습니까? 야곱도 돌을 세웁니다(창 28:18).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 이 믿음으로 돌을 세웁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가는 곳마다 돌을 세웁니다. 가는 곳마다 제사(예배)를 드립니다(창 31:45. 35:14-1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창 31:45).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창 35:14-15).

이처럼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행동합니다. 돌을 세우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꿇어 엎드리고, 간절함을 표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7:12절 말씀의 주인공 사무엘이, 바로 믿음의 조상들인 이분들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사무엘도 미스바에 돌을 세우고 있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돌을 세웁니다.

성도 여러분. 미스바는 그 옛날 야곱이 돌을 세운 곳입니다(창 31:45). 그리고 바로 그곳 미스바에 사무엘이 돌을 세우고 기도를 드립니다(삼상 7: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믿음의 조상들처럼 돌을 세우는 것입니다. 돌을 세우는 일에, 예배를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의 삶을 도우실 것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필요할 때에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간절한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엘로힘이십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엘로힘의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이레의 하나님이 되시고, 때로는 라파의 하나님이 되시고, 때로는 닛시의 하나님이 되시고, 때로는 샬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항상 에벨에셀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순간순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그리고 사무엘처럼, 돌을 세우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돌을 세우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예배할 때에, 전능하신 엘로힘의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에벤에셀이 되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함께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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