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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약

May 9, 2026

이런 부모. 이런 자녀.
(민수기 20:22-29)

주원영담임목사

우리는 매년 5월이 되면 어버이 주일을 지킵니다. 한 사람 “앤나 잘비스”라는 여성 신앙인의 헌신으로 우리가 어버이 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날은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상업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래를 가지고 있는(유래는 요약에 기록하지 않음) 어버이 주일에,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며 한 가정의 아버지였던 아론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데스를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지도자인 아론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는 진리는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칭찬이나 격려보다는 흑백의 논리로 잘잘못을 따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명확하고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 중에서 흠이 없는 사람을 찾아보세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모르셔서, 그들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믿음의 선진들이라고 세우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허물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좋은 점을 보셨습니다. 장점만 보신 것이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아론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존경받았던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오늘 본문은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건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민 20:24)

아론의 부족함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하여 시내산근처에 도착하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백성들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주고 섬기도록 했던 사람입니다(출 32장). ◎뿐만 아니라, 모세가 구스 여인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을 때,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비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에 연류되어 있는 아론이었기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아론이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민 20:29).

오늘 어버이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들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십니까?

우리의 부모님들도 인간이시기에, 완전하지 못한 모습들을 많이 보이셨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볼 때, 약점이 많고 허물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우리들이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삶의 유산을 남겨 주신 분들입니다. 자식들을 키우시는 일에 모든 정열을 다 쏟으셨던 분들이십니다. 그분들을 향하여 부족하다고, 틀렸다고, 자신있게 말할 자격이 있는 자녀들은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부모님들을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의 허물 때문에, 지금 나를 이곳에 있도록 해 주신 부모님들의 아낌없는 헌신을 외면해 버리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론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아론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믿음의 사역은 계승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이 자녀들에게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넓게 생각하면, 부모님들은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인생의 선배이고 신앙의 선배입니다. 그렇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삶의 대부분은, 인생의 후배들인 자녀들을 통하여 계승되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이 하시던 것을 모두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삶은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계속 이어지는 계승입니다. 아론의 죽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따라 아론과 그의 아들인 엘르아살과 함께 호르산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역사의 계승식을 합니다(민 20:26-28).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아버지와 아들이 임무를 교대하는 순간입니다. 너무도 엄숙하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성경적으로 부모의 죽음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육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부모는 없어졌지만, 동시에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계승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아버지이면서 선배인 아론을 계승하여, 후배이며 아들인 엘르아살이 지도자의 상징인 제사장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이며 선배인 아론이 이루지 못했던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아들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아론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지도자 아론이 자신의 겉옷을 벗겨 자신의 아들인 엘르아살에게 입혀주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내 맘에 꼭 맞지 않는 부모일지라도, 약점과 헛점 투성이인 부모일지라도, 그래서 때로는 외면했던 부모일지라도, 그분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내가 포기하면 아들도 포기하게 될까봐, 이를 악물고 달려왔다고.” 자식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몸까지도 버리실 각오가 되어 있으신 분이 바로 우리의 부모님들이고 나의 부모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자녀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분들에게 눈이 되어드리고, 그분들의 손이 되어드리고, 그분들의 발이 되어드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바로 이 모습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믿음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아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교훈입니다. 기억하시고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6:2-4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2-4). 아멘.

May 2, 2026

성도의 삶. 성숙.
(베드로전서 2:1-3. 베드로후서 3:18.)

주원영담임목사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에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적 발달장애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성장하지 못하는 당신의 자녀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이, 가슴 아파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이력과는 상관없이 영적 발달장애를 겪는 수 많은 영적 미숙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두 가지 경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름만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명목상 기독교인”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거듭남의 확신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는 “미성숙한 기독교인”입니다. 때때로 이분들로 인하여 교회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베드로의 삶을 통하여 권면을 받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영적 발달장애를 극복하고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아직은 영적으로 젖을 먹고 자라가야 할 갓난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바울 사도도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1-2).

성도 여러분.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교훈하고 있는 영적 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성경 기자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영적 아이들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먹기는 하지만,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는 영적인 영양결핍(말씀의 무지)의 상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늘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몇 년이나 예수를 믿었느냐? 직분이 무엇이냐? 이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아직도 영적인 미숙아의 상태입니다(고전 3:3. 벧전 2:1). 우리 안에 아직도 이런 모습들이 남아있다면, 아직 내가 영적인 아이라는 증거들입니다. 영적인 성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영적 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영적인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놀라운 특징입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기독교의 정체성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바로 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에베소서 2:8-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도,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영적 성숙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은혜들을 사모하는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신앙은 영적으로 병든 신앙입니다. 찬송가 183장의 가사처럼,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은혜를 공급받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히 4:6). 우리는 늘 부족한 존재이지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와 은혜를 공급받아 영적으로 자라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성숙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영적인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의 영적으로 성숙하게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은혜와 함께 지식을 강조합니다. 이 지식은 영적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입니다(벧후 3:18).

영적 성숙의 본질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며 그를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배고픔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의 사람이 성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늘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읽고 배워야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고 또 읽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깨닫고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결단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배우셔서, 영적으로 자라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pr 25, 2026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들
(고린도후서 12:7-10)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가 기록한 성경들을 세밀하게 읽어보면, 그 편지들 속에는 우리의 무릎을 치게 하는 몇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자랑”입니다. 자랑하는 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대단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자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부정적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 자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런데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는, 이 자랑이라는 단어를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드러내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우상에게 드리는 제물에 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혼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서를 자세히 읽어보시면, 이와 같은 모든 문제들이 “자랑”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앞부분인 고린도후서 10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 10:8).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고후 10:13). 10:15절 말씀도 분수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랑할 것은 다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0:16-17절 말씀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6-17).

이어지는 11장에서도 이 자랑이라는 말은 계속됩니다.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고후 11:10). 11:12절, 11:26절, 11:18절 말씀에서도 계속해서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나열하더니, 11:30절에서는 부득불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어쩔 수 없이 자랑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마다 조심스럽게 자랑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장에 와서는 부득불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왜 자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12:1절 말씀입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후 12:1). 바울 사도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자랑하는데,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부득불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 12:5).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을 예로 들면서 자랑한다고 합니다. 낙원에 갔다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부득불 자랑하는 이유를 한 번 더 말합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후 12:6).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합니다. 자랑을 하다 보면, 말을 많이 보태서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말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 말하는 것을 그만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합독한 7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와 “자기 자신의 자랑”이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자신에게 가시가 되어 늘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그런데 첫 번째 기도에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도에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χάριζ)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늘 찌르고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랑이 언젠가부터 삶의 가시가 되어 자신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왜 그렇게 자랑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세상적인 것,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자랑하면서 살았더니, 나중에 그것이 자신에게 올무가 되어서 오히려 육체의 가시로 계속해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아가고 있더라도, 그 육체의 가시와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나에게 은혜를 주시기는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시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려면, 나의 약함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나의 약한 부분을 채워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약한 부분을 더 강하게 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견치 못한 일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우리만큼 준비하지 못해서, 우리보다 지혜롭지 못해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들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보살펴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가진 것, 내게 있는 것,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드러내고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내게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를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복음을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예수와 복음을 사랑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자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의 약한 부분까지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 약함이 더 강해지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Apr 18, 2026

어떤 표징이 나타날까?
(요한복음 20:11-18)

주원영담임목사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식당에 가면 파를 건져내는 사람, 마늘을 건져내는 사람, 두부를 먹지 않는 사람, 당근을 골라내는 사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음식을 가립니다.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왜 충격을 받은 기억들이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깊게 각인되어 남아있을까요? (이런 현상들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빙산이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어떤 무리들이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그 무리들은 예수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믿고 따랐던 예수가, 어느 날 붙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예수를 죄인으로 판단하고 십자가형을 구형했습니다. 예수는 손과 발에 못이 박혔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리고 높은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더구나 원수들은 그의 속옷을 벗겼고 어떤 병사는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고, 잠시 후에 “테텔레스타이” 하시고는 운명하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하였고 자신을 위하여 준비한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요 19:38-40).

이렇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장례를 마쳤습니다.

이런 일이 지나고 3일이 되던 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두운 시간에, 향유를 가지고 예수의 무덤을 찾은 여인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저만큼 굴러가 있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세마포로 염을 했는데 그 세마포가 가지런히 개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나 말을 합니다(요 20:13). 허탈함을 가지고 몸을 돌이켜 무덤에서 나오는데, 그 여인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부활하신 예수께서 대화를 나눕니다(요 20:15-16). 이른 새벽, 아직 어두웠을 때에, 무덤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여인들은 이런 행동을 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마 28:8). 기뻤지만, 나무나 무서웠기에 그 현장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내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부활 예수를 만나기 전에 저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무서움과 좌절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러간 것처럼 그 마음속에서 다 물러가고, 저들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이 가득차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여인들에게만 일어났던 변화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서 떨고 있었던 그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도 여인들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걱정하면서 엠마오를 향하여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던 이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도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내일의 부활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이 아닙니다. 오늘의 부활입니다. 막연한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 부활입니다.

실의에 빠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우리들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그분은 오늘의 부활 예수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 이런저런 문제들로 말미암아 막달라 마리아처럼, 제자들처럼, 엠마오로 내려가는 자들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있고, 질병으로, 사업으로, 물질로, 자녀의 문제로, 인간관계로 힘들어 하고 계신 성도님들이 계신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외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내적으로는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고, 외적으로는 부활 예수가 필요한 자들을 찾아가게 됩니다. 말하게 됩니다.

◎무덤가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요 20:18).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입을 열어서 말을 합니다,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요 20:25).

◎인간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을 제자들이 이야기하기에 믿을 수 없었던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고는 외칩니다(요 20:28).

◎희망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의 터전인 엠마오를 향하여 힘없이 걸어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오던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눅 24:33.35).

◎황당한 주장을 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라는 공문을 품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이 빛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변화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행 9:20-22).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저들의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그냥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만 믿어집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두 가지 표징이 나타납니다. ◎기쁨과 평안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지배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에게 평안이 찾아오고 자연스럽게 내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본능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요 20:17. 28:7.19).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입술을 열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 주시고 함께 일해 주십니다. 우리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나아가면, 성령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앞서가시면서 다 준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진리를 믿고, 입을 여시는 성도가 되시고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만이 “길”이십니다. 주님만이 “진리”가 되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 되십니다(요 14:6). 우리가 이 진리를 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눅 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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