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Jul 13, 2025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이 괴로울 때
(누가복음 19:1-10)
주원영담임목사
살아가면서 삶이 힘든 이유들이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삶이 힘든 것입니다. 세상의 삶이, 모두 관계로 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문제들은, 해결되어지고 덮어지기는 하지만 절대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아픔과 괴로움과 상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전하는 말씀의 내용도, 삶의 괴로움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을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도 그렇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삭개오의 삶은 그의 삶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금을 걷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동족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들이 변화되거나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그를 용납해 주셨고 그도 이웃들을 용납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8).
이 고백으로 삭개오가 가지고 있던 괴로움은 이제 더 이상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의 상처는 더 이상 상처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을 만났을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를 보세요. 그가 주님 앞에 서기 전까지는 동족들에게 받고, 따돌림을 되돌려주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의 주위에는 그가 받은 상처보다 삭개오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7-18). 이 권면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앞에 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내버려둔다는 의미가 아니라, 화목하려고 애쓴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힘들고 괴롭더라도, 선을 행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들을 모두 행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 중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받은 성도들을 싸매주고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제는 선을 행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것을 결단했습니다. 적극적인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분열시켜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12:8절 말씀에서, “할 수 있거든” 이 말씀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상처를 품고 살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재산 절반을 내어놓고 속인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한 삭개오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구원의 선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삭개오는 세금을 거두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같은 민족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없는 자였습니다. 유대인의 자손이었습니다. 단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결단한 삭개오에게서 이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은 상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 가운데서도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상처는 아무리 포장하고 감추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해야 하고 도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은, 그 상처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계획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받은 상처로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그 상처로 얻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받은 상처 때문에 아픈 경험을 많이 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만져주심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살아가는 동안 받은 상처만을 기억하시면서 힘들게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상처보다 더 큰 은혜를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 내려주실 것입니다.
Jul 6, 2025

감사하는 삶
(여호수아 4:19-24)
주원영담임목사
보리는 맨 처음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고지대에서 재배가 시작되어, BC 5000년경에 이집트로, BC 3500년에 메소포타미아로, BC 3000년에 유럽 북서부로, BC 2000년에는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와 재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그리고 그 이후 출애굽 시절에도 주 식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곡식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보리”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도, 룻이 밭에 나가서 주었던 이삭도, 다 보리였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출 23:16). 이어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 23:19).
그리고 모세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이 명령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16:9-12).
이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수 5:11-12). 이 소산물은 보리였습니다. 그 보리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만들어 먹고 있습니다. 제사음식들입니다. (레위기 23:10-14절에 맥추절을 지키는 규례가 기록되어 있음).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레 23:14). 첫 곡식단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흔들면서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번제로 드리고 곡식을 볶아 화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빵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절대 먼저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강을 건넌 이들이 빵을 먹고 있습니다. 볶은 곡식을 먹고 있습니다. 저들은 이미 맥추감사절을 지킨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저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지킨 첫 번째 맥추감사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맥추감사절을 지킨 곳이 “길갈”이었다고 19절에 기록하였습니다.
“길갈”은, 저들이 요단강 바닥에서 가지고 온 열두 돌을 세웠던 곳입니다(수 4:20).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의 제사를 드린 곳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은혜를 기억하려는 의미로 돌을 세웠습니다.
저들은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강 가운데입니다. 삶의 현장입니다(수 4:9). ◎유숙할 곳입니다. 우리 가정입니다(수 4:8). ◎길갈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수 4:20). ◉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삶의 현장에서 기념되기를 원하시고, 우리 가정에서 기념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념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 맥추감사절 지킨 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교회”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따라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했고, 아이 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가나안 땅 북쪽 땅들을 점령했고, 남쪽의 땅들도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행동이 이상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수 10:15.43). 점령한 땅은 지켜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길갈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을 기념하는 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승리하고는 계속해서 길갈로 돌아온 것입니다.
저들이 길갈을 찾았다는 것은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했다는 뜻입니다.
지난날의 수치를 물러가게 하신 하나님. 우리의 죄악을 등 뒤로 던지신 하나님(사 38:7).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악을 옮겨주신 하나님을(시 103:12) 기억하는 장소.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길갈을 저들이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것까지도 감사했다는 뜻입니다.
길갈에서 저들이 손에 쥔 것은 단지 보리였습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어 먹어야 하는 보리였습니다. 가난한 자의 음식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것을 손에 쥐고 길갈에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시고 감사드리셨을 때에 기적이 일어난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 6:11). 결과는 장정만 5,000여명이 먹고 그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습니다.
◉거두어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길갈에 도착한 저들에게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셨습니다(출 13:21-22). 뿐만 아니라 만나와 메추라기도 내리지 않습니다(수 5:12).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둥처럼 의지하던 모세도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신 34:5-6).
그러므로 길갈은 감사하고 싶은 현장이 아니라, 원망할 장소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을 기념하는 길갈을 찾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념하면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들은 결코 길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돌아와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이렇게 고백하는 욥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욥에게 다시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길갈을 찾은 저들은, 첫 번째 맥추감사절에 이것들을 감사했습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죄악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보리 이삭과 같이 작고 보잘것 없는 음식을 놓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거두어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일지라도 주신 것을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거두어 가신 것이 있을지라도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을 때, 우리의 앞을 막고 있는 여리고 성을 정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이 성도 정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장차 기업으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Jun 29, 2025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로마서 12:11)
주원영담임목사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을 보면서, 젊었을 때 얼마나 건강에 대한 준비를 했는지가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건강을 인생의 “상”이라고 말하고, 질병을 인생의 “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건강한 모습이 그동안 어떻게 생활해 왔느냐를 보여주는 성적표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건강처럼 늘 정확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건강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책임이 아닌데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셨을 때, 모두가 부정적인 결과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중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로, 불신앙의 사람들과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고생해야 했습니다. 공동체의 일원이었기에 짐을 함께 져야 하는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신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상황에 있다면 이해하겠지만, 내가 이 가정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우리 집안에 찾아온 불행 때문에, 지금 내 삶이 이렇게 힘들다고 불평하신 경험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보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부지런히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롬 12:11). 너무나 맹목적이고 바보 같은 일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열심히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아도 소망이 없고 기쁨이 없기에, 언젠가는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먼저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성도님들 중에는 나는 절대 게으르지 않았다고 항변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마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가 그런 사람일 것 같습니다. 그가 애굽의 왕자였던 시절에 자신의 백성을 도우려고 하다가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데, 그 순간 모세는 살인자로 알려졌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됩니다. 좋은 마음이었는데, 누명을 쓰고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추락된 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아마 너무도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른 목자들에게 희롱을 당하는 제사장의 딸을 도와준 인연으로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결과는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꿈꾸어 왔던 지도자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에 이어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 말씀은 “열심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힘들고 불만스러운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안에서 열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열심”이 생기고, “섬기는 모습”이 보이는 사람은, 지금 펼쳐진 환경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자에게 열심과 섬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으면서 그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삶의 불만족스러운 것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들의 이름까지 “게르솜(이방에서 객이 되었다)”이라고 지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주어진 환경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삶을 바꾸어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이 주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삶에서 “열심”과 “섬김”이 나타납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를 향하여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열심있는 삶이 되고 만족한 삶이 되기 위하여는 ◉인내해야 합니다.
다시 모세를 생각해 보세요. 그가 제일 힘들어 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가는 40여년동안 그의 화려한 과거의 경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다짐을 합니다. “누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다해 살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시고, 사용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자신을 견딜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평가 앞에서 스스로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을 내세우려 하면, 인간적인 방법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런 자들에게 강하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인내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열심있는 삶이 되고 만족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소탐대실(小貪大失)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힘이 들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크게 보입니다. 가장 필요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큰 축복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알면서도 물질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에는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인데, 알면서도 넘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의 말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다. 오직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시고 하나님 앞에서 소탐대실하지 마시고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열심있는 삶이 되고 만족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불만들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들을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약 5:4.7.9).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들까지를 참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일을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불만족스러운 일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소탐대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셔서,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기쁨을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Jun 22, 2025

하나님의 전을 채우는 신앙
(느헤미야 11:1-2)
주원영담임목사
느헤미야서는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을 재건한 직후의 일들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런데 11장에 기록된 말씀의 시작이 조금 이상합니다.
1절 에 ◎ “거주하였고. 거주하게 하고. 거주하게 하였으며.” 이 표현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번역이 조금 아쉽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자리를 잡았다. 정착했다”는 의미입니다. “지도자들도 오랫동안 거주하게 하였고. 백성들도 그곳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이런 의미입니다. “너희들 여기 살아라” 하면서 억지로 주저앉혔다는 뜻입니다.
또한 1절에는 ◎“제비 뽑아.” 이런 말도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없어서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뽑힌 사람은 마지못해 예루살렘에 주저앉았습니다.
이어지는 2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느 11:2). 이 말씀 때문입니다. “너희들 참 안됐다. 그곳에서 살겠다고 하니 잘 살아 봐라. 하나님께서 복 주시길 바란다.” 이런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모습들을 설명한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는 많은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백성들과 함께 폐허가 된 성을 새롭고 멋있게 리모델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느헤미야는 왜 사람들이 거주하기를 싫어하는 예루살렘을 그렇게 힘들여서 재건했을까?
예루살렘은 그 옛날 멜기세덱이 살렘 왕으로 통치했습니다(창 14:18).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창 22:2. 대하 3:1). 다윗은 그곳을 수도로 정하고, “예루살렘(평강의 기초)”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전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도라는 의미를 넘어서 “성전이 있는 곳. 예배를 드리는 곳. 순례하는 곳. 하나님을 만나는 곳.” 이런 의미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종교적 특성이 강한 곳으로 점점 변해가자 ◎자연히 생활의 규제와 지켜야 할 법규가 많아지고 엄격해졌습니다. ◎게다가 절기 때가 되면 이곳저곳에 살고 있던 친척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일주일에서 길게는 50일까지도 머물렀기에 숙소는 말할 것도 없이 식수마저도 모자랐고, 특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지켜야 할 법규가 너무도 많아 상권도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수도였지만, 중요한 장소였지만, 주거지로서 메리트가 전혀 없었습니다.
바로 그 예루살렘이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서 함락되자 그곳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미련 없이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심지어 성전을 지켜야 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까지 다 그 성을 떠났습니다. 그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다 모든 성읍에 흩어져 각각 자기 기업에 살았고(느 11:20). 예루살렘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이, 사람들의 기억속 에서 점점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절기도, 예배도, 기도도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도 잊혀져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만 텅 빈 것이 아니라, 저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 성을 느헤미야가 재건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단순히 한 나라의 수도를 재건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담겨져 있는 “정신과 신앙과 정체성을 재건한 것”입니다. “무너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텅 빈 믿음을 다시 채우고 회복하려고 예루살렘 성읍 재건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또한 그곳에 억지로 사람들을 머물게 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느헤미야는 먼저 ◉백성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거주하도록 권면합니다(느 11:1). 그리고 ◉제비를 뽑아 백성의 십 분의 일은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합니다(느 11:1). 좀 싫지만, 불편하지만, 마음에 안 들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많지만, 그곳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최선을 다하여 권면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자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오늘 창립 1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이 말씀을 눈여겨보고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비워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외곽의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지려고 하지 말고, 사람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런 사람들로 예루살렘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3절 말씀에도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이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교회로 말씀드리면, 장로님과 안수집사님 권사님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제비 뽑힌 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이곳저곳을 섬기도록 임명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분들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순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자원하는 것입니다. 정성으로 내가 채워야 할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몸이 멀어지면, 자연히 마음도 열정도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횟수가 줄어들면, 교회에 대한 관심도 헌신도 사모하는 마음도 줄어듭니다. 내가 예루살렘인 성전을 비우면, 내 안에 믿음도 사명도 열정도 점점 비워집니다.
그러나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성전을 채우면, 내 안에 믿음과 사명과 열정도 점점 채워집니다. 나의 삶이 귀한 하나님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영적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느헤미야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저들은 예루살렘에서, 초라하지만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을 성경은 무려 7대 손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대 손이며(4절) 칠대 손이라(5절). 다 용사였느니라(6절).” “칠대 손이며(7절) 성읍을 다스렸느니라(9절).” “오대 손이며(11절) 육대 손이며(12절) 현손이며(13절). 그들의 감독이 되었느니라(14절).” “현손이며(15절).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17절).” “그들의 책임자가 되었느니라(21절).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이 전 일을 맡아 다스렸으니(22절).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렸느니라(24절).” 대대로 축복의 가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최후의 승리를 얻는 자요, 영적 성벽을 쌓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런 자들과 같이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전을 채우시는 성도님들 되셔서 자손 대대로 축복의 가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