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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약

Apr 11, 2026

부활하신 예수가 주시는 오늘의 은혜
(요한복음 20:19-29)

주원영담임목사

지구촌에는 약 4,500여개의 종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님들께서는 그렇게 많은 종교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왜 예수를 선택하셨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한 시간 좋은 말씀을 듣고,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예배만을 드리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왜 예수를 왜 믿는지, 내가 믿는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확실히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골고다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힘껏 눌러 씌우고, 손과 발에는 대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지 6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라는 사람은 운명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가 죽은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요 19:32-34). 예수의 시신은 십자가에서 내려졌고 아리마대라는 사람의 무덤에 장사 지내졌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았습니다. 그것도 믿을 수가 없었는지, 무덤 입구를 인봉했고 군사들을 배치시켜서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난 날, 무덤을 막았던 돌은 저만치 굴려졌고, 그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세마포는 가지런히 개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 안에 계셔야 했던 그분이,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하셨습니다(고전 15:3-8).

부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여러 명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는 여러 장소에 나타나셨습니다. 한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백 명이 동시에 보았기에 그것은 속일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순간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40일 동안 반복되었던 이 일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착각의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있기에, 의심 많기로 유명했던 예수의 제자 도마도 예수 앞에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예수 믿는 사람을 경멸했던 유대인이면서 수학자였던 “아인슈타인”도 그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에 교회를 무시하고 경멸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인생의 석양 녁에 나는 교회 이외의 그 어떤 곳에서도 내 영혼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부활의 주님 품으로 돌아온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의 부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예수의 부활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나 또한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고전 15:51-52). 그분이 부활하셨습니다. 나 또한 그분처럼 부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고전 15:20).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일은 장차 일어날 일입니다. 내일의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 부활이 죽은 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오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윗의 표현과 같은 힘들고 어려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예수 부활이 지금의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까?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 부활사건이, 우리가 장차 죽은 후에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까?

천안함 사건(2010년)으로 우리의 아들들 46명이 차가운 바다속에 수장되었습니다. 세월호 사건(2014년)으로 270여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상기온으로 인한 사건. 전쟁과 지진으로 인한 사건들이 뉴스를 통하여 우리의 귀에 들리고 눈에 보입니다. 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고 현실의 모습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죽은 후 먼 훗날에 당신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고 기쁨과 평안을 누릴 것이라는 소식이, 질병 때문에 고통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기대가, 불행은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과연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을까요? 믿지만, 믿어야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가슴에 와 닿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우리와 똑 같은 환경에 던져진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저들은 지금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문을 닫고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어두운 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죄책감과 상실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들에게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려버리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예수였습니다. 그분은 죄책감과 상실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셨지만, 희망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6). 이 말씀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왜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평강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까?

그래서 2,000년 전의 그 현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한 여인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1). 두려움에 떨고 있는 11명의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19).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요 20:27).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요 21장).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은, 한결같이 현재의 부활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지금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 처절한 자들입니다. 평안과 기쁨이 필요하고, 희망과 꿈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오늘의 삶이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칩니다. 두려움을 떨어내고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옵니다.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삶의 현장에서, 오늘의 부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오늘의 부활의 기쁨과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성도님들을 축복합니다. 부활 예수를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부활 예수를 믿으면, 내일의 부활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은, 내일의 부활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런저런 일들로 힘들어하고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저와 우리들이 다시 살아나는 현재의 부활입니다. 치료함을 받고 회복을 경험하는 현재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왜 예수인가? 왜 기독교인가?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유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들에게 오늘의 부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이 있더라도 부활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이 해결해 주십니다. 물질의 문제도, 자녀의 문제, 마음의 문제도, 건강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해결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음성을 성도님들에게 들려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음성이, 성도님들 가정에, 영원한 교회에, 내 사업장과 일터에, 들려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도 되지 않고 우리의 능력으로도 되지 않지만, 오늘 우리가 부활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슥 4:6).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내 삶에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주시기만 하면, 나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에서 해결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의미 없는 삶이, 의미 있는 삶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과 질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실망과 좌절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을 마음껏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에게, 내일의 부활은 물론이거니와, 오늘의 부활도 경험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pr 4, 2026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요한복음 20:30-31)

주원영담임목사

부활주일이 되면 우리는 다른 주일보다 특별히 더 기뻐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3일 만에 살아나셨다는 그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주일을 맞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부활주일이 연례행사처럼 되어가는 모습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모습들을 뒤로 하고, 살아계신 주님을 날마다 믿음으로 만나고 느끼고 감격하는, 체험적인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신앙의 양면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을 고백하는 나의 믿음이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부활”은 지적인 내용이지만, “부활의 주님”은 체험적 신앙입니다.

◎“예수 부활”을 말하는 자는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말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모습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다르면서도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양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부활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신다면, 부활하셔서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보여져야 합니다. 날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느끼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보여지는 성도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살아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에게는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완전히 변화된 세 그룹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몇몇 여인들입니다. ◎열 명의 제자들과 여러 명의 무명의 제자들입니다. ◎도마라는 제자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변화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어떠한가?” 돌아보려고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집니다(눅 23:27).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실 때 그 뒤를 따라간 사람들 가운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 속에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처참하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슬픔을 참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장례하는 그 일을 정성으로 돕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흘이 되던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손에 향유를 들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눈앞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간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슬픔에 싸여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요 20:11).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눕니다(요 20:15).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마리아야(요 20:16). 예수님께서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들은 마리아는 슬픔에 잠겨 있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는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이 은혜가, 부활을 기뻐하면서 찬양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요 20:19).

19절 이하의 말씀을 보니, 열 명의 제자들이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이적을 보여주셨을 때 제자들은 기세가 등등했을 것입니다. 겁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께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감과 용기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특별히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변한 모습이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샬롬”하시면서 말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이미 장사까지 지냈는데, 그분이 지금 눈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문도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축 처져있던 어깨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가슴을 짓눌렀던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용기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모습을 “기뻐하더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요 20:29-20). 이어서 그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세상으로) 보내노라 (요 20:21).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던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세상은 무섭고 두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를 막론하고 마음속에 이런저런 공포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인생을 동행해 주시는 주님을 날마다 만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 있는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5-26절 말씀이 두려움에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십니다. 질병의 두려움에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앞날을 걱정하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이분 주님을 믿으시고 만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에게는 ◉의심이 사라집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열 명의 제자들이 있는 곳에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요 20:25). 하지만 도마는 조금은 짜증스러운 모습으로,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이렇게 말하는 도마에게 주님께서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성도님들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주님의 부활을 보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믿는 이 믿음이, 영원한 나라에 갈 때까지 변하지 않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도마처럼 예수님을 만나시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도마처럼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이렇게 고백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는 이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에게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찾아옵니다. 소망이 없는 자가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방황하는 자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입으로만 예수 부활을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사적으로만 예수의 부활을 믿는 모습에서 벋어나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들은 예수를 믿는 모습이 아닙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부활하신 그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런저런 일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요동치 않게 붙들어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삶 속에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Mar 28, 2026

꼭 기억해야 하는 은혜
(마가복음 15:33-39)

주원영담임목사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의 마지막 죽음의 모습은 참 평온했습니다(모세. 아브라함. 다윗).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33년밖에 살지 못하였고, 그의 마지막은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33년의 삶도,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오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나의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그때는 유대인들이 명절로 지키는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수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는 모습을 보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백성들이 원하는 그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일 후에는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도 아시고 준비하시는 모습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저는 종려주일인 오늘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버림받으신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던 종교인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저들에게 이렇게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무사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끝내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 권력을 쥐고 있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를 죽이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고 증오하고 분열합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습니다. 나만 옳다고, 교파를 나누고 또 분열시키면서 갈라섭니다. 그것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인데,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로마가 예루살렘을 잘 관리하라고 파송한 사람이었습니다. 총독이고 지도자이고 정치인입니다. 그가 예수를 밤새 조사했지만, 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자기 아내도 특별한 꿈을 꾸고는 남편인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에게 손을 대지 말 것을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거세지는 군중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고 결국 예수를 군중의 요구대로 십자가형으로 죽게 했습니다. 전형적인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자기의 유익이나 입지에 따라 그것을 손에 쥐고 누리기 위해서는 시시각각으로 입장을 바꾸는 정치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중들도 예수를 버렸습니다. 몇일전 저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누가 선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중을 선동한 저들은 아주 교묘하게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권 때문에 예수를 버렸고, 군중들은 잘 몰라서 예수를 버렸다고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3년이나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은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자들도 주님을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3년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마치시고 저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비장한 각오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을 같이 되더라(눅 22:44). 얼마나 간절하셨으면, 한밤중에 산에 올라가셔서 피땀을 흘려가며 기도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시면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 예수님께서 붙잡히자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 14:71).

우리의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조롱을 당하시고 버림을 받고 계시는데, 그 장본인이 내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후회하면서 통곡했던 베드로처럼 주님을 버린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는 끝난 것 같은데, 그런데 주님께서 절규하십니다. 그 이유는, 또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절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면서 호소하고 있는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의 응답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눅 23:44). 빛 되신 예수님께서 빛을 잃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아들이신 예수를 이렇게 고난을 받게 하고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유는, 예수가 그렇게 버려지고 제물이 되어야, 이 세상이,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외아들 예수를 버리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는 이런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를 버리는 대신, 인간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만드시고 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에 버림을 받지 않아야 마땅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대신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종교인들에게 버림을 받으셨고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고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 가는 동안,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버림을 받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주신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Mar 21, 2026

성도의 삶. "비전(꿈)"
(창세기 15:1-7)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신앙인들에게 비전(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비전(꿈)을 마음에 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을 “꿈. 비전”이라고 부릅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그 어떤 희망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그 꿈이 어떻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욕심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으로 나타나고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마음에 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비전을 품고 살아가려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비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습니다.

미국이 경제 대공황에 직면했을 때 당시 대통령이셨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미국 32대 대통령)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오직 두려움 자체뿐이다(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우리들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듣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했던 IMF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웠지만, 금을 모으면서 이겨냈습니다. 코로나19라는 질병이 전 세계를 펜데믹으로 몰아갔지만, 결국 참으면서 지혜롭게 잘 이겨냈습니다.

꿈을 가지려면, 먼저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비전(꿈)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던 두려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성도 여러분. 아브람에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기에, “내 인생이 여기에서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창 15: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늘 읽고 듣고 깨닫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눈 앞의 일들에 더 중요한 것 같기에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두려움이 내 삶의 현장에 찾아왔다고 느낄 때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시고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비전을 품고 살아가려면 ◉구체적인 비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친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 하소연에 대답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창 15:4). 그리고 밖으로 인도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비전을 기억하도록 시청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전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미래입니다. 하지만 비전은 기도로 시작된다는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창 15:2).

꿈을 가지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꿈을 이루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적인 꿈, 인간적인 야망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성경적인 비전은 우리의 기도에서 태어납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꿈꾸지도 않았고 계획하지도 않았지만, 애굽에서 억압받고 있는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비전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는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어느 날 조국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게 하시고 그 가슴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신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구체적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비전을 품고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셔도, 그 비전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믿지 않으면, 비전은 결국 몽상이 되고 맙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 비전을 잉태하는 첫걸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반응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인 우리의 목표와 모델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비전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함을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의 비전의 성취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헌신하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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