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Jun 15, 2025

금보다 더 귀한 믿음
(여호수아 1:1-9)
주원영담임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라암셋(고센)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와 마라와 엘림을 거쳐 르비딤 골짜기를 지나서 시내 산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을 떠나 가데스바네아와 에돔 등을 거쳐서 사해바다 옆에 있는 모압 지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힘든 여행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렇게 어렵고 힘든 많은 환경들을 모두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 땅에서 가나안 땅까지 가는 길이 아무리 길고 험난했다고 하더라도, 40년씩이나 걸릴 그렇게 멀고 긴 여정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19:1절 말씀을 보면, 고센 땅에서 시내 산까지 약 50-6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0:11-12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근처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약 1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37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서 머물렀다는 말입니까?
민수기 21:11절 말씀과 21:20절 말씀을 보시면, 저들은 광야 40년의 대부분의 시간을 모압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민수기 22:1절 말씀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에서 거처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요단강 바로 앞, 여리고 성이 눈앞에 보이는 그 장소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여정을 풀고 집을 짓고, 축사를 짓고, 농사를 짓고, 결혼을 하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지낸 광야의 여정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머문 “시내 산”은 하나님은 만나는 장소이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압”이라는 곳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압이라고 비유된 그곳이 어디입니까? 어떤 곳이기에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까?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에 머물게 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모세가 죽었기 때문입니다(수 1:1-2).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는데 내려오지 않으니까, 백성들이 아론에게 간청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거기에 경배했습니다. 이 말은, 저들이 모세를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모습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가 손을 내미니 홍해가 갈라졌고, 바위를 치니 바위에서 물이 솟아났고, 손을 들고 기도하니 철병거로 무장한 아말렉을 이기는 기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갑자기 죽었습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연자실한 것입니다. 신명기 34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처럼 대단했던 모세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흔적도 남기지 않게 하시고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보이는 모세를 더 이상 바라보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너희를 여기까지 인도한 전능하신 너희의 하나님인 나를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세 대신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귀한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히 13:8. 계 1:8). 항상 영원한 현재이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금보다 더 귀한 이 믿음을, 언제 어떤 사람에게 주십니까?
◉내가 붙잡은 것을 놓을 때 선물로 주십니다(수 1:1).
여호수아서를 살펴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하나님 품에 안겼는데(수 24:29),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아마도 80세가 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기록을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지내왔지만(출 33:11).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께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늘 회막에 엎드려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는데, 80년이 지나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여호수아 1:1절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보이는 모세도 함께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보이는 것을 함께 의지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아니 나타날 수가 없는 환경을 여호수아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붙잡을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붙잡기 시작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의지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 손에서 놓았을 때, 내 신앙이 그런 모습일 때, 그때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말씀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가르칠 때 선물로 주십니다(수 1:7-8).
믿음은 말씀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집니다.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유언했습니다(신 6:4-9).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가르쳐야 합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나의 모세를 놓을 때, 그때 그 믿음의 선물이 나에게 주어집니다.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나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소원한 것들이 다 이루어집니다.
이 은혜가 삶의 현장에 풍성하게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un 8, 2025

주님의 마지막 담판
(요한복음 21:15-17)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요 21:15). 식사를 하신 후에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담판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셨고, 또 여러차례 담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빌라도와의 담판에서 예수님께서 지셨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눅 23:23). 결국 이 담판에서 지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담판에서 져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지금 제자들은 있는 저 북쪽 갈릴리에 새벽 미명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이 가득찬 음성으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들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 주시려는 주님의 간절한 음성이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위하여 숯불을 피워 놓으셨고 떡을 준비하셨고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손으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드디어 아침식사가 끝나자 담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목하시면, 주님께서 아주 특이한 호칭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호칭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요 21:15.16.17).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시지 않으셨던 호칭입니다. 왜 마지막 시간에 사용하신 것일까요?
지금 담판을 하려는 상황이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예의를 표시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존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빌라도의 법정 안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보았음에도 다른 제자들을 이끌고 3년 전까지 생활의 터전이 있었던 저 북쪽 갈릴리로 돌아가서 뱃일을 시작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내려보지 않으시고 존중하는 태도로 담판에 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렇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주님께서는 아가페로 물으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두 번째 질문과 대답도 똑 같았습니다(요 21:16). 주님께서 세 번째 물으십니다(요 21:17). 그런데 이번에는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귀한 두 가지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➊아가페(αγαπη)이신 그분이, 아가페를 포기하십니다. 필레오 밖에 모르는 베드로를 야단치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주님의 수준은 아가페였지만, 그 수준을 포기하시고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❷부족한 인생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베드로를 향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시면서 존중해 주시는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세 번씩이나 똑 같은 대답을 했지만, 세 번째 대답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큰 변화가 보여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 21:17).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이 대답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드리는 대답입니다.
아가페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담판 앞에서 두 번씩이나 당당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인 필레오로 내려오시니까, 그의 당당함은 무너지고 오히려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비탄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상대를 높여주는 것, 상대의 입장으로 내려오는 것,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결국 이것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섬김의 삶을 살아오신 주님께서 지금 베드로를 높여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이해하여 주십니다. 일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하신 자신이 하신 말씀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삶은 삶이고.”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이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부활하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내 삶에 개입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계산으로는 손해보는 것 같고 지는 것 같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만 하시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그 사건 속에 나타납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 상황에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항상 높은 곳에서 상대를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상대가 약점을 드러낼 때는 하대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관계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에게는 주님의 은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나의 수준에 맞추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의 수준에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아가페(αγαπη)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허물과 못남과 부족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여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가페(αγαπη)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면, 그 현장에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건을 변화시켜 주시고, 사람을 변화시켜 주시고,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저와 성도들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un 1, 2025

전폭적으로 믿는 우리의 모습
(요한복음 21:1-9)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일련의 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이, 모두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은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충격을 받게 되면 그 장소에서 떠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합니다.
아마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저 북쪽 갈릴리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떠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훤하게 알고 계시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 그냥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갈릴리로 달려오셨습니다(요 21:4).
본문 4절에 기록된, “날이 새어갈 때”라는 말씀이, 주님께서 밤새도록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달려오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요 21:4).
그렇게 밤새 달려오신 예수님께서, 지금 바닷가에 서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계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계셨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5).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파이디온(얘들아).” 이렇게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물고기를 언급하십니다.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익투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프로스파기온(생명의 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단 한번, 이곳에서 사용하셨던 단어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고기가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엑소(붙잡았느냐. 손에 쥐고 있느냐.)” 손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먼저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막 10:14).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막 10:16). 바로 파이디온이라는 단어 속에는, 주님의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 디베랴 해변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그런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익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프로스파기온”이라는 단어를 쓰신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배고파하는 저들을 보시면서 당신의 몸을 주어서라도 저들의 배고품을 해결하실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다는 마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자식이 잘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부모의 마음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신 이유입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있느냐(엑소)”라고 물으신 이 말 속에는 저들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실패한 저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회복하도록, 기회를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음성이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이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없나이다 (요 21:5). 그리고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다시 던집니다.
바로 그때 그 현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요한복음 2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6).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밤새도록 수 없이 많이 던졌던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시 던지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물을 다시 던졌더니, 빈 그물을 채워주셨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비로움을 보여주셨습니다(요 21:9). 저들이 배에서 내려 올라와 보니, 숯불이 피어져 있고 생선이 구워져 있고 떡이 있었습니다.
찬 바람을 맞으면서 밤새 애썼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저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채워주신 것입니다. 그물이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추위를 이길수 있도록 숯불을 피워 주셨습니다. 시장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떡과 물고기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시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한마디의 꾸짖음도 없습니다. 한마디의 책망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33년 동안이나 우리와 똑 같은 삶을 사셨기에, 인간의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기에 야단치시거나 정죄하거나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을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이 마음을 안다고 말하려면 우리에게서 세 가지의 모습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➊주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서 떠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나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내 곁에 계십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➋그분에게 지금 내가 처해있는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것처럼 행세하면서 자기를 변명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아담을 부르시면서, 가인을 부르시면서, 금송아지 사건 앞에서도, 사울 왕이 스스로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임하였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변명하는 모습을 싫어하셨습니다.
모세처럼 지팡이밖에 없습니다(출 4:2). 이렇게 솔직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❸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수 없이 던졌던 장소이지만 다시 던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의심하지 않고 다시 던지는 것입니다(눅 5:5-6). 말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전능하신 그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완전히 부셔뜨리셔서 새것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시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깨어진 우리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주님께서 다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물이 찢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숯불과 물고기와 떡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 주님을 향하여, 내 삶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맡기시는 그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May 25, 2025

선택이 중요합니다 (빼앗기지 않는 좋은 것을 선택하는 삶)
(누가복음 10:38-42)
주원영담임목사
언젠가부터 “절제”는 영적인 건강에 꼭 필요한 덕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절제를 하지 못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일을 줄이지 못하는 “마르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일행들과 함께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살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 일행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자매의 모습이 전혀 달랐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은 같은데, 한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고 한 사람은 전혀 바쁘지 않았다는 이 모습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랑삼아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사는 삶은 결코 잘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나 일에도, 음식처럼 절제할 수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마르다의 바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현대인을 대표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문제가 나타납니다.
◉많은 일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41절).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했던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 벅차게 되니까, 기쁨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오히려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인 마리아가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 곁에만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몹시 거슬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바쁘고 분주한 삶은,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가져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특별히 자기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까지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일도 도와주지 않고 있는 마리아를 나무라시거나 도와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고 급기야 예수님을 향하여 불만을 쏟아냅니다(40절).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 아마도 마르다는, 일을 하지 않고 말씀만 듣고 있는 자기 동생 마리아보다 예수님이 더 미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까지 짜증을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집에 식사를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생각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에만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많은 일로 염려하고 걱정하다 보니까, 육신이 피곤해집니다. 육신이 피곤해지니까, 자연히 다른 사람과 충돌하고 하나님과도 충돌하게 됩니다. 가장 사랑하고 이해해야 할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일은 뒷전입니다. 예배드리는 일도, 기도하는 일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도, 어느새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맙니다.
사탄 마귀가 노리는 허점이 결국 이런 모습인데, 때때로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무엇이 우선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라는 것은, 마르다와 같은 복잡한 삶을 선택하지 마시고, 마리아와 같은 더 좋은 선택을 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처방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처방은 ➊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에게서 찾으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그 원인이 나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너무 많은 욕심과 일 때문에, 내가 힘들고 다른 사람도 힘들고 공동체까지도 힘들어하지는 않는지를 생각하며, 남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나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문제는 해결되어질 것입니다.
➋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42절). 너무 바뻐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고 말하고, 기도할 시간이 없고,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고, 봉사하지 못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성도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하고 필요한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한 것처럼,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또 더 성장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신앙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신앙의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해야 합니다. 불요불급한 것이 아니면 과감하게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고 지켜줄 분은, 사랑하는 배우자요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을 가지시고, 신앙의 가지치기를 하시면서 꼭 필요한 일에만 집중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➌좋은 편을 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주님의 뜻은 식사가 아니라 말씀에 있었기에, 마리아는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올바르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해야 합니다. 더 좋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을 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성도님들께서는 정말 좋은 선택을 하신 분들입니다. 이 좋은 선택을 빼앗기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내 마음대로 살게 하려고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만, 유혹에 넘어가서 좋은 선택을 버리고 잘못된 길로 가는 성도들의 삶이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선택하신 좋은 것들을 빼앗기지 마시고 끝까지 간직하심으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