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Aug 24, 2025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
(창세기 28:10-22)
주원영담임목사
본문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의 축복은 받은 한 사람을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은 것보다 더 놀라운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늘 문이 열린 모습”입니다.
성경 이사야 41:14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이라는 자를 벌레(옛성경 : 지렁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렁이 같고 벌레 같은 야곱을 만나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세워 주셨습니다. 그의 열 두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나아가 그 후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더 감격스럽고 감사한 것은, 벌레라는 별명 대신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름인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이 야곱의 인생은, 어머니 뱃속에서의 싸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쌍둥이로 잉태되어 세상에 먼저 나오려고 했지만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형이 되고 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들에서 돌아온 형 에서가 죽을 쑤고 있는 야곱을 보고서는 죽 한 그릇만 달라고 합니다. 그때 야곱이 죽 한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삽니다(창 25:29-33). 이렇게 장자의 명분을 죽 한그릇으로 산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형 에서에게 알려졌고, 야곱은 허겁지겁 먼 나라로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도망가다가 피곤하여 깊이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에 깊은 잠이 든 야곱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1-12).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고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5).
하나님께서, 어떤 이유와 근거로 야곱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야곱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기적이 나타난 이유를, “부모의 기도”에서 찾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도 집을 떠나 본 경험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야곱을 광야로 떠나보낸 상황에서, 그 부모들이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겠습니까?
야곱은 너무 피곤하여 잠에 골아 떨어졌지만, 부모들은 깊은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식을 위하여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이삭과 리브가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부모의 간절하고 애끓는 기도가, 위험한 길을 가면서 힘들고 지친 야곱 앞에, 하늘 문이 열려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가는 앞길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풍성히 임하기를 원하십니까?
이삭처럼, 리브가처럼 자녀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부모의 기도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부모의 기도는, 자녀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해주십니다. 부모의 기도는, 하늘 문이 열린 벧엘로 그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부모의 기도는,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게 해주시고,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해주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28:15절에 약속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정확히 20년 후에 하늘 문이 열리는 장면을 보았던 그곳 벧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함으로,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에 천사들뿐만이 아니라 사람들과도 싸워서 이겼다는 뜻의 이름인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고, 하늘로부터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성도님들을 축복합니다. 성도님들께서 간구하는 기도가, 야곱에게 임하셨던 임마누엘의 축복이 되는 기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늘 문이 열려지는 축복을 경험하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려진 하늘 문이 닫혀지지 않도록,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놓지 마시고 붙잡고 매어달리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Aug 17, 2025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배워야
(요한복음 17:1-5)
주원영담임목사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배우려고 힘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어서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를 깊이 묵상하고 그분을 닮아가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머든 모습을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로마서 8:29절에서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 8:29).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일생동안 “그리스도를 본받는” 이 한 가지가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빌 3:10), 예수의 부활하심과(롬 6:5), 예수의 흔적까지도(갈 6:17) 본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마 1:21).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5-8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십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히 말합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것 역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며 사셨습니다(눅 2:51).
이 땅에서 이렇게 사셨던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사건이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기도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현장에서 주님께서 드린 기도의 핵심은 17:4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었다”는 이 말씀은, “순종하셨다”는 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드린 주님의 이 기도에 이어서, 주님께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순종하기로 다짐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주님께서도 우리와 똑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가능하면 그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마태는 마태복음 26:39절 말씀에서 조금 더 안타깝게 기록하였습니다.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옮겨주시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본심이셨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깨달으신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피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셨기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 :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모든 것을 다 완성했다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모든 일을 다 순종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다 순종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순종하는 모습을 거듭 강조합니다(고후 1:17-18).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라. 그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물이 찢어질 것 같은 축복이 나타났습니다. ◎가서 너희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니까, 오랫동안 고생했던 한센병에서 깨끗이 치료함을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라.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놀라운 역사가 저들 앞에 펼쳐졌습니다. ◎일어나 걸으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에 순종한 자들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놀라운 기적과 축복을 맛보는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에는 힘들고 아프다 할지라도 한 번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예비해 놓으셨던 놀라운 축복을 풍성하게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기억이 있다면, 그때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부어주셨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기억하신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항상 순종의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다시 한번 모셔 들이시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시는 주의 자녀들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ug 10, 2025

믿음의 도전이 주는 축복
(마태복음 14:22-33)
주원영담임목사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 베드로가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갈릴리 바다를 아무런 장비도 없이 걸어가겠다고 합니다(마 14:28). 무모해 보였지만, 물 위로 발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이내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생각할 때, 실패한 사건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존 오트버그” 목사님은 그의 저서 “물 위로 걸으려면 단순하게 믿으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독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배 안에서 배 밖으로 나오는 모험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비록 잠시지만 그가 물 위를 걸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택은 베드로의 몫(우리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모험이,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런 모험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모험은 ◎순종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영웅심에서 그 모험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라고 명하시면 기쁨으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마 14:28). 주님의 명령이면 순종하겠다는 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험이 세상 사람들의 모험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를 능력의 주님으로 확실히 믿기에,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모험을 할 때, 그 기준이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모험은 ◎믿음의 모험이어야 합니다.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에 이름을 올린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모험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물 위로 발을 옮긴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믿고 모험을 시작한 것입니다(마 14:28-29).
그러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다고 기록했습니다(마 14:30). 순간 그는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믿고 행했기 때문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그 모험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한 모험이었습니다. 결괴적으로 실패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완전한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믿음을 잃어버리고 물속에 빠진 베드로를 주님께서 건져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하지만, 이런 모습을 통하여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더 성장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베드로에게 이날의 경험은, 부분적인 실패를 통하여 더 큰 믿음의 모습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험 앞에서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철저하게 점검하고 믿음으로 행하십시오. 그리고 그 모험의 기준은, 순종의 모험이고 믿음의 모험이어야 한다는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모험에 함께 하시고 기적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 속에는 중요한 두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잠간동안이었지만 베드로는 인류 최초로 물 위를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을 잡아주신 주님께서 배 위로 오르시자마자 신기하게도 바람이 그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가 모험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경험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바로 이 경험이 모험을 선택한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순종을 믿음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경험을 했습니다.
이 상황을 마가복음 6:48절에서는 조금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지나가려고 하시매(παρέρχομαι. 파레르코마이).
주님께서는 지금 한 밤중에 갈릴리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며 고생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맞은편 산에서 보고 계시다가, 도와주시려고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신앙의 상식으로 당연한 것이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내니.” 이 말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는 현재이다(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말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물 위를 걷다가 물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구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치셨습니까? 낙심이 되는 일이 있으십니까?
다시 한번 신앙의 모험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그 모험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를 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힘들고 지쳐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내 손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힘들었던 모든 환경들까지도 잠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성도님들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Aug 3, 2025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
(에베소서 2:8-10)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 2:10절 말씀을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엡 2:10).”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포이에마”라고 기록하였습니다(만드셨다. 작품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의 독특한 “예술적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창조주의 “걸작품(masterpiece)”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걸작품이 대단합니다. 100조개의 세포 조직, 25조개의 적혈구, 250억개의 백혈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지구상에는 약 70억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 모든 사람들의 지문이 같을 가능성은 640억대 1이라고 합니다.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쉴 새 없이 좌절하고 넘어지며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걸작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❶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으면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지어진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걸작품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게 되고, 타락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회복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회복의 첫걸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걸작품다운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는 방편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공로나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엡 2:8-9).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처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바로 이 모습을 본문 10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엡 2:10).
구원의 확신이 없으시거나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시면, 먼저 믿음으로 거져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걸작품 인생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걸작품 인생으로 살아가려면 ❷창조주의 선한 기대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창조주의 선한 기대를 따라 살게 하려 함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본문 8-9절에서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열매인 선한 행함이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에베소서 2:8-9절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혜+믿음=구원+행함. “은혜+믿음-행함=구원”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뭔가 조금 부족한 생각입니다. 구원의 열매로 나타나는 선한 행위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에,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죄를 안 지을 수 있는데 지었다는 말은, 그 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악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선을 행할 능력이 생겼습니다. 이 희망이,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모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엡 2:10).
걸작품 인생으로 살아가려면 ❸교회 공동체의 지체로서 그 기대를 실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드려지기 위하여 우리를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두셨다고 말합니다(엡 2:22).
인생이 혼자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대를 이룰 수 없기에 아담에게 돕는 베필을 주신 것과 같이, 우리를 더불어 사는 인생이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가정만으로는 성취하기 어려운 더 큰 선을 이루시고자 하나님께서는 더 큰 영적가족을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엡 2:19). 그래서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붙들어 주고, 함께 세워주고,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며, 서로의 인생이 걸작품이 되도록 돕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선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모임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작은 모임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교제를 통하여, 울고 웃으며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하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추구하는 걸작품 인생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향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공사 중인 건물 곧 성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지만 공사를 진행하는 모든 과정이 다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고의 위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질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인내하며 세워주고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공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그날을 소망하며 인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불평하는 대신 서로를 세워주고 스스로를 세워가는 기쁨으로 날마다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분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세워가는 공동체로 인하여 기쁨을 나누고 감사를 드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