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May 18, 2025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
(룻기 2:8-13)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 우리의 고민들을 해결해 주기도 하고, 우리의 미래를 성공으로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펼친 룻기서는, “저주받은 곳이라고 불리는 모압이라는 땅에서 태어난 한 여인 룻이, 엘리멜렉이 가장으로 있는 신앙의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성경입니다. 룻은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이라는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고 잘 살게 되었고, 그 계보에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보여지지 않는 성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과 마침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우연과 마침을 가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룻은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엘리멜렉 가문을 다시 세우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통로는, 우리가 아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뜻밖의 경우도 있다는 말입니다.
룻기는 4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성경이지만, 여러 모습의 축복의 통로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 번째는 밭입니다(룻 2:3). 삶의 현장입니다. 두 번째는 늙은 어머니입니다(룻 1:22). 부모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인 세 번째 축복의 통로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축복의 통로가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본문에는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와 사환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밭에서 만나게 되고,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맺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관계을 잘 표현해 주는 대표적인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 만나서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대화”입니다. 우리들의 말이, 또 다른 축복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대화를 나눕니다(룻 2:19).
룻이 자부로서 효성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오미가 자부를 마치 자기의 친딸처럼 대하고 아끼고 있는 모습은 특별합니다. 본받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본받을만한 것은, 이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 보아스에 대하여 나누는 대화의 내용입니다(룻 2:19-20). 좋은 말을 계속 이어갑니다. 축복의 말을 하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보아스는 듣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사람, 바로 보아스를 놓고 이야기하면서 좋은 점만을 말합니다. 뒷담화를 하지 않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나오미와 룻의 대화 내용처럼,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일지라도 축복의 말을 해 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보아스와 사환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합니다(룻 2:4).
주인이 자신의 사환들에게 먼저 인사를 합니다. 사환들이나 종들이 먼저 주인에게 인사들 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주인 되시는 보아스가 아랫사람들에게 먼저 겸손하게 인사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환들이 주인 되시는 보아스를 향하여 답을 합니다. 주인과 사환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 자리에 없는 룻에 대하여서도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을 해 주면서 칭찬합니다(룻 2:5-7).
이 모습을 본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있든지 없든지 축복의 말만을 해 주고, 긍정적인 말만을 해 주고, 칭찬의 말만을 해 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아스와 룻이 대화를 나눕니다.
성도 여러분. 보아스와 룻은 처음부터 신분이 다른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룻은 이방인이요, 홀로된 여인입니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보잘것 없는 여인입니다. 보아스의 입장에서 볼 때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을 보아스가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주고 있습니다(룻 2:8). 룻도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룻 2:10). 신앙인인 우리들이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닮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룻기에 등장하는 룻과 나오미, 그리고 사환과 보아스의 대화를 통하여 깨닫는 진리는,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통로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씨앗과도 같습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무의식속에 심겨져서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그 내용과 똑같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특별히 신앙인들의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영향을 미칩니다. 내 입의 말이, 내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내 입을 통하여 전달된 말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을 축복의 통로로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축복의 통로가 되는 말은 어떤 말일까요?
◎은혜로운 말입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함으로 덕을 세우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은혜로운 대화를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신중함이 있는 말입니다. 남의 말을 할 때는 가능한 대로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특히 없는 사람을 놓고 이야기할 때는 더욱 조심함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칭찬해 주는 모습을 늘 잃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함이 보여지는 말입니다. 나와 여러가지 환경이 다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잘것 없는 나를 자녀삼아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늘 낮추고 늘 섬기는 겸손함을 가지고 겸손한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로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도님들의 입에서, 부정적이고, 불평과 원망과 정죄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면, 마태복음 7:3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내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보실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볼 수만 있다면, 먼저 내 부족함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부족한 점들을 주 앞에 아뢸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축복은 내려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 축복을 확실히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로운 말을 하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중함이 있는 말을 하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함이 보여지는 말을 하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기를 힘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합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May 11, 2025

누구의 아들로 살아야 할까?
(여호수아 19:49-51)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되게 사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뒤로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성도님들께서는 지난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살아오셨습니까? 그렇게 해서 손에 쥐신 것이 무엇입니까? 특별히 자녀들에게 어떤 모습의 부모가 되셨습니까?
오늘 부모를 생각하는 어버이 주일 예배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 갔습니다.
영성학자 “헨리 나우엔”이 어느날 우연히 네델란드의 유명한 화가였던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하여 세 가지 깨달음을 받습니다. 그 깨달음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원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탕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아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헨리 나우엔은, 세 가지 깨달음 중에서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이 말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세상적인 것들을 다 내려놓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내려놓습니다. 맨몸으로 캐나다에 위치한 “데이 브레이크”라는 장애인공동체로 들어가서 일생을 지냅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에 대하여서도 처음부터 받아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관하여서는 제3의 인물정도로 미루어 두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된다는 것, 아버지의 자리는 내가 돌아가는 것이 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안식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의 핵심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하나님께서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는, 아버지가 되라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아버지가 되고, 어떤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시고 계실까요?
여호수아 19장에는, 여호수아가 땅을 정복한 후에 그 땅을 분배하는 마무리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9장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호칭이 특별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9:49.51). 이 표현은 여호수아서에서 무려 28번이나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한두 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눈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특별합니다. 심지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나는 눈의 아들입니다. 내 아버지는 눈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여호수아의 아버지 눈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아버지를 자신의 이름 앞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찾습니다. 아버지 눈은 세상적으로는 화려하지 못했을지라도, 아들 여호수아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내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은 것입니다.” 이런 무언의 말이 “나는 눈의 아들입니다.” 하는 이 말 속에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수아된 것은 바로 아버지 “눈”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여호수아가 여호수아된 것은 아버지 “눈”때문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이 호세아였습니다. 아버지 눈이 아들의 이름을 호세아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원래 이름이었던 호세아라는 이름을 버리고 여호수아로 불러주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오직 민수기에 한 번만 등장합니다(민 13:8). 모든 경우에 그의 이름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라는 이 이름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까?
마태복음 1:21절 말씀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예수”라는 이름이 “여호수아”입니다. 헬라식으로 표현하면 “예수”가 되고, 히브리식으로 표현하면 “여호수아”가 됩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자신의 삶이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뜻을 가진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누구의 아들로 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요셉의 아들로 살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몸이지만 결코 요셉의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그의 일생을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호세아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여호수아로 살기를 원했다는 말은, 육신의 아버지 눈의 아들로 살기를 힘쓰는 것과 함께 더 크고 높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로 살기를 힘썼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또 한 분의 아버지가 계셨는데, 바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일생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기를 힘쓴 여호수아에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축복은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딤낫 세라”의 축복입니다.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수 19:50).
“딤낫 세라”라는 곳은 여호수아서에만 등장하는 특이한 지명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볼품이 없는 산지지만, 딤낫 세라라는 이름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열매가 많이 맺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딤낫 세라가 여호수아서에서만 등장하는 이유를 연구하고는 이런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이 땅이 여호수아만의 고유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땅을 분배했지만, 여호수아 외에는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땅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한 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여호수아에게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 많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여호수아에게(수 13:1. 24:29) 넉넉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노후를 기대지 않았습니다. 딤낫 세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호수아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이 외침을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여호수아의 외침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딤낫 세라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묻힙니다(수 24:30).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는 인생의 말년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온 여호수아에게 넉넉하고 여유있는 삶의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습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시기를 힘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y 4, 2025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 나타나는 표징
(요한복음 20:11-18)
주원영담임목사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경우들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특별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빙산이론으로 이러한 상황들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어떤 무리들이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그 무리들은 예수를 믿고 따랐는데, 그 예수가 어느 날 죄인이 되어 붙잡히시고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신 것입니다. 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혔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졌고 높은 나무에 지친 모습으로 매달려 계시다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고는 잠시 후에 “다 이루었다(데델레스타이)” 이 말을 남기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 광경을 막달라 마리아와 그의 곁에 있었던 여인들은 그들의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 3일이 지나서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두운 새벽 시간에 예수의 무덤을 찾았던 저들의 눈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저만큼 굴려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의 시신을 염했던 세마포는 가지런히 개어져 있습니다. 놀란 저들 앞에, 천사가 나타나 말하고 여인들이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
이렇게 허탈함을 가지고 몸을 돌이켜 무덤에서 나오는 순간 그 여인 앞에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그분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그런데 이 말이 끝나자 그분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마리아야(요 20:16). 주님께서 여인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온몸이 오싹하면서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행동을 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 새(마 28:8). 기뻤지만, 나무나 무서웠기에 그 현장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그분의 부활 사건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지속적이었고 삶의 패턴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부활을 경험한 자들에게는 ◉내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부활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두려움과 불안과 무서움과 허탈과 좌절만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 예수를 만나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다 물러가고, 그 마음속에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이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마 28:8). 이 모습은 부활 예수를 만난 여인들에게만 일어났던 변화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 변화입니다.
무섭고 두려워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던 그 현장에 부활 예수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인들에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걱정하면서 엠마오를 향하여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내일의 부활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나타나는 부활이 아니라, 오늘의 부활입니다. 막연한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 부활입니다.
바로 실의에 빠져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우리들, 우리들의 이런 모습들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분은 오늘의 부활 예수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예수,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을 경험한 자들에게는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부활 예수를 만나면, 내적으로는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부활 예수가 필요한 자들을 찾아가게 됩니다.
◎제일 먼저 부활 예수를 만났던 마리아의 모습을 보세요.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8). 무덤가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그리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기도 모르게 입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 예수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이 부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고 입을 열어서 말을 합니다, 담대하게 부활 예수를 증거한 것입니다.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했던 도마에게, 우리가 보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을 저들이 이야기하고 있기에, 도마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부활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이렇게 외칩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입이 열렸습니다. 의심했던 마음이 확신하는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부활 예수를 증거하는 제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변화되었습니다. 부활 예수를 만난 후에, 오던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전합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말하더라(눅 24:35). 저들의 입이 열렸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라는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그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이 한 마디의 음성 앞에 사울이 무릎을 꿇습니다. 변화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변화된 사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20). 부활 예수를 만난 후에 입이 열렸습니다. 예수를 전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다고 합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행 9:21).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행 9:22).
성도 여러분. 부활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부활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외적인 표징입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표징이 있습니까?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로 인하여 구원받았다.” 이렇게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그냥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부활 예수와의 만남이 있어야만 믿어집니다. 그리고 부활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두 가지 표징이 나타나게 됩니다. “삶에서 기쁨과 평안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내 입이 열립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논리적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나를 지배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고 자연스럽게 내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본능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나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주님만이 길이십니다. 주님만이 진리가 되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사탄을 이기셨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고,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올 때에 저를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26).
바라는 것은, 예수를 자랑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 예수를 만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심으로, 우리를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게 해 주시는 하늘의 은혜를 맛보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pr 27, 2025

대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
(출애굽기 3:6-10. 살전 2:4-5)
주원영담임목사
부활은 하나님의 현재적 계획과 섭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현재적 부활을 체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를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청지기에게 가장 기본이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보세요. 태어나서 40년 동안 애굽에서 다양한 학문을 익혔습니다. 두번째 40년 동안에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마지막 40년 동안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복음을 전함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은, 다메섹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바울 사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저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려면, 먼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렸습니다(출 34:33.35). 엘리야도 하나님을 만나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왕상 19:13). 천사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사 6:2).
“가렸다”는 말은, 숨겼다는 뜻입니다.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벋은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경외함의 표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가리는 것은, 피조물들의 자연스러운 태도이고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주시는 교훈은 ◉하나님은 보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출 3:7).
“본다”는 이 말은 “꿰뚫어지게 보고 계신다”는 뜻을 가진 “라아”라는 히브리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꿰뚫어지게 보고 계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처럼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보고 계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나 홀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그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만 보시고 끝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계속 보고 계십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계 1:14. 대하 16:9. 잠 15:3). 우리를 백성 삼으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을 보고 계신다는 이 말씀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듣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출 3:7.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간구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 분이십니다(시 34:15).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내 말을 들어주십니다. 갈 길을 인도해 주시고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바로 이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계심을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출 3:7).
안다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야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대충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뼈저리게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고통에 동참하셔서 그 아품을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근본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 139:2-3.6). 나의 머리털까지도 세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마 10:30).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우리 하나님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출 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 3:8). “인도한다”고 번역된 단어는 “회복한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알라”라는 단어입니다. 보셨고 들으셨고 아신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일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모세를 통하여 행하셨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것과 같이, 우리를 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믿으시고 이 은혜를 늘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땅은 빈 땅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을 얻는 수고는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꼭 기억하시는 말씀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인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도구로 사용하셔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따라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가겠다고 결단하시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결단할 때 축복이 임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보셨고 들으셨고 아신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일하신다고 약속하시면서 외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대속의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사역을 우리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우리를 사용하시려고 하십니다. 대속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 일을 감당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감당하는 자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출 3:8).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 주십니다(롬 8:28).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심으로 이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