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Mar 28, 2026

꼭 기억해야 하는 은혜
(마가복음 15:33-39)
주원영담임목사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의 마지막 죽음의 모습은 참 평온했습니다(모세. 아브라함. 다윗).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33년밖에 살지 못하였고, 그의 마지막은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33년의 삶도,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오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나의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그때는 유대인들이 명절로 지키는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수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는 모습을 보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백성들이 원하는 그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일 후에는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도 아시고 준비하시는 모습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저는 종려주일인 오늘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준비하시는 주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버림받으신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던 종교인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저들에게 이렇게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무사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끝내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 권력을 쥐고 있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를 죽이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고 증오하고 분열합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습니다. 나만 옳다고, 교파를 나누고 또 분열시키면서 갈라섭니다. 그것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인데,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로마가 예루살렘을 잘 관리하라고 파송한 사람이었습니다. 총독이고 지도자이고 정치인입니다. 그가 예수를 밤새 조사했지만, 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자기 아내도 특별한 꿈을 꾸고는 남편인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에게 손을 대지 말 것을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거세지는 군중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고 결국 예수를 군중의 요구대로 십자가형으로 죽게 했습니다. 전형적인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자기의 유익이나 입지에 따라 그것을 손에 쥐고 누리기 위해서는 시시각각으로 입장을 바꾸는 정치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중들도 예수를 버렸습니다. 몇일전 저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누가 선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중을 선동한 저들은 아주 교묘하게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권 때문에 예수를 버렸고, 군중들은 잘 몰라서 예수를 버렸다고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3년이나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은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자들도 주님을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3년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마치시고 저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비장한 각오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을 같이 되더라(눅 22:44). 얼마나 간절하셨으면, 한밤중에 산에 올라가셔서 피땀을 흘려가며 기도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시면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 예수님께서 붙잡히자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 14:71).
우리의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조롱을 당하시고 버림을 받고 계시는데, 그 장본인이 내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후회하면서 통곡했던 베드로처럼 주님을 버린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는 끝난 것 같은데, 그런데 주님께서 절규하십니다. 그 이유는, 또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절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르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면서 호소하고 있는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의 응답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눅 23:44). 빛 되신 예수님께서 빛을 잃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아들이신 예수를 이렇게 고난을 받게 하고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유는, 예수가 그렇게 버려지고 제물이 되어야, 이 세상이,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외아들 예수를 버리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는 이런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를 버리는 대신, 인간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만드시고 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에 버림을 받지 않아야 마땅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대신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종교인들에게 버림을 받으셨고 ◉세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고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해 가는 동안,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버림을 받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주신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Mar 21, 2026

성도의 삶. "비전(꿈)"
(창세기 15:1-7)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신앙인들에게 비전(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비전(꿈)을 마음에 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을 “꿈. 비전”이라고 부릅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그 어떤 희망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그 꿈이 어떻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욕심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으로 나타나고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마음에 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비전을 품고 살아가려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비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습니다.
미국이 경제 대공황에 직면했을 때 당시 대통령이셨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미국 32대 대통령)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오직 두려움 자체뿐이다(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우리들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듣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했던 IMF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웠지만, 금을 모으면서 이겨냈습니다. 코로나19라는 질병이 전 세계를 펜데믹으로 몰아갔지만, 결국 참으면서 지혜롭게 잘 이겨냈습니다.
꿈을 가지려면, 먼저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비전(꿈)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던 두려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성도 여러분. 아브람에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기에, “내 인생이 여기에서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창 15: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늘 읽고 듣고 깨닫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눈 앞의 일들에 더 중요한 것 같기에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두려움이 내 삶의 현장에 찾아왔다고 느낄 때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시고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비전을 품고 살아가려면 ◉구체적인 비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친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 하소연에 대답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창 15:4). 그리고 밖으로 인도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비전을 기억하도록 시청각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전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미래입니다. 하지만 비전은 기도로 시작된다는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창 15:2).
꿈을 가지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꿈을 이루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적인 꿈, 인간적인 야망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성경적인 비전은 우리의 기도에서 태어납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꿈꾸지도 않았고 계획하지도 않았지만, 애굽에서 억압받고 있는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비전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는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어느 날 조국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게 하시고 그 가슴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신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구체적인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미래를 기다리는 비전을 품고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셔도, 그 비전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믿지 않으면, 비전은 결국 몽상이 되고 맙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 비전을 잉태하는 첫걸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반응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인 우리의 목표와 모델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비전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함을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의 비전의 성취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헌신하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Mar 14, 2026

성도의 삶. "평화(평안)"
(빌립보서 4:6-7)
주원영담임목사
중세시대(5세기-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높고 깊은 산중에 위치한 수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립니다. 사제가 나가보니 무척이나 피곤에 지쳐 보이는 중년의 신사가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아마 밤새 산을 오른 것 같아 보입니다. 사제가 문을 열어주며 묻습니다. “누구를 찾아 오셨나요?” “예. 저는 평화를 찾아 왔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유명한 “신곡”의 저자인 “단테 알리기에리”였습니다. 그리고 “신곡”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내 인생의 한 순간 눈을 떠서 보니, 나는 바른 길을 벗어나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단테는 20대에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고, 30대에 자기 고향 피렌체에서 정치에 입문했다가 실패했습니다.그리고 이제 40대가 되었지만 갈데 없는 영혼의 방랑자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성도님들 중에 단테처럼 마음의 평화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바울 사도는 평화를 얻는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평화는 깊은 감옥도 빼앗아 가지 못한 평화였고, 손과 발을 채우고 있는 쇠사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던 평화였고, 죽음의 두려움도 빼앗아 갈 수 없었던 평화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평화가 필요한데, 이 평화를 누리고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넘쳐나는 평화를 경험하시려면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염려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마음의 염려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기록된 “염려”라고 번역된 이 단어(메림나오 : μεριμνάω)는 “마음이 찢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염려에서 해방되려면,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염려를 그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많은 경우 염려한다고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마 6:27).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염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게 염려한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염려를 중단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기억하시고 염려를 중단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넘쳐나는 평화를 경험하시려면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염려하는 것들을 기도로 이겨내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빌 4:6).
염려할 모든 것들을 기도하는 모습으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염려할 일이 기도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염려해도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변화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약속하셨습니다(빌 4:7).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면서 살아갑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가 지켜주시는 모습입니다. 부족한 종이 다시 한번 성도님들의 삶을 축복합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꾸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를 풍성하게 누리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넘쳐나는 평화를 경험하시려면 ◉평화의 하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평화가 되시는 하나님을 나의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본문은, 만일 우리가 염려를 중단하고, 염려하는 모든 것을 기도하는 삶으로 바꾸어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지킬 것이라고 약속합니다(빌 4:7).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평화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평화의 하나님은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것이지만, 이렇게 설명드리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로서 저의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과, 언제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되어 주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자녀들은, 선물을 주는 아버지보다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 아버지가 더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말입니다. 그래서 염려를 기도로 바꿈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는 자들에게, 바로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빌 4:9).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시작은, 이 땅에 오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잃어버린 것을 아신 그분께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마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이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담은 허물어지고, 우리는 평화의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엡 2:14). 이 은혜에 감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단테의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나이 40이 되어 수도원을 찾았던 그는 새롭게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해 펜을 들어 무려 13년간의 시간동안 한 권의 책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이름을 이렇게 명명했습니다. “신곡(Divine Comedy)”
인생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라 위대한 기쁨과 평화의 서사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로 시작한 그의 고백이 담긴 신곡은 “나는 행복하다. 나는 자유하다. 나는 참으로 완벽하게 고요한 평화를 맛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 최고의 시성 단테가 찾은 이 평화를, 오늘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에게 내려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염려를 버리시면 됩니다. ◉염려를 기도로 바꾸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이심을 믿고 영접하면 평화가 내게 임합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를 선물로 받으시는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r 7, 2026

성도의 삶. "섬김"
(고린도전서 9:19-23)
주원영담임목사
신앙생활을 해 가는 동안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긍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자유가 박탈된 종의 모습은 부정적이지만, 자원하는 종의 모습은 긍정적입니다. 자원하는 종의 모습은 이웃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섬김의 모습을, 종된 삶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그래서 종된 삶, 바로 섬김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삶을 가르치면서 먼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참 자유인이라는 것을 먼저 말하는 이유는, 참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서서는 진실한 섬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행하는 봉사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모습으로 억지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진실하고 참된 섬김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한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성도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에서 이런 모습이 보여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은 ◉이웃들을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 사도는 예수를 만나고 참된 자유인이 되었지만, 이제 그 자유를 반납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 사도의 모습을 “자유의 종. 자발적인 종”이라고 부릅니다.
바울 사도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 그러나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조건은, “우리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느냐가 쓰임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합니다(참고. 이용구 선교사의 내려놓음과 더 내려놓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가지고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려놓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은 ◉이웃들의 구원을 위하여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바울 사도는 자신이 종이 된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고전 9:20.22).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섬김은 “종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에게는 이런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특권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웃들을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웃들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삶의 초점을 그들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성도님들 모두에게 이와 같은 참된 섬김의 모습이 보여지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