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Jun 29, 2025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로마서 12:11)
주원영담임목사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을 보면서, 젊었을 때 얼마나 건강에 대한 준비를 했는지가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건강을 인생의 “상”이라고 말하고, 질병을 인생의 “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건강한 모습이 그동안 어떻게 생활해 왔느냐를 보여주는 성적표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건강처럼 늘 정확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건강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책임이 아닌데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셨을 때, 모두가 부정적인 결과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중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로, 불신앙의 사람들과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고생해야 했습니다. 공동체의 일원이었기에 짐을 함께 져야 하는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신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상황에 있다면 이해하겠지만, 내가 이 가정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우리 집안에 찾아온 불행 때문에, 지금 내 삶이 이렇게 힘들다고 불평하신 경험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보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부지런히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롬 12:11). 너무나 맹목적이고 바보 같은 일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열심히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살아도 소망이 없고 기쁨이 없기에, 언젠가는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먼저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성도님들 중에는 나는 절대 게으르지 않았다고 항변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마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가 그런 사람일 것 같습니다. 그가 애굽의 왕자였던 시절에 자신의 백성을 도우려고 하다가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데, 그 순간 모세는 살인자로 알려졌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됩니다. 좋은 마음이었는데, 누명을 쓰고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추락된 것은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아마 너무도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른 목자들에게 희롱을 당하는 제사장의 딸을 도와준 인연으로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결과는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꿈꾸어 왔던 지도자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에 이어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이 말씀은 “열심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힘들고 불만스러운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안에서 열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열심”이 생기고, “섬기는 모습”이 보이는 사람은, 지금 펼쳐진 환경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자에게 열심과 섬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으면서 그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삶의 불만족스러운 것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들의 이름까지 “게르솜(이방에서 객이 되었다)”이라고 지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주어진 환경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삶을 바꾸어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이 주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삶에서 “열심”과 “섬김”이 나타납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며 어디를 향하여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열심있는 삶이 되고 만족한 삶이 되기 위하여는 ◉인내해야 합니다.
다시 모세를 생각해 보세요. 그가 제일 힘들어 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가는 40여년동안 그의 화려한 과거의 경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다짐을 합니다. “누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다해 살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시고, 사용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자신을 견딜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평가 앞에서 스스로를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을 내세우려 하면, 인간적인 방법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런 자들에게 강하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인내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열심있는 삶이 되고 만족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소탐대실(小貪大失)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힘이 들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크게 보입니다. 가장 필요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큰 축복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알면서도 물질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에는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인데, 알면서도 넘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시스 쉐퍼”의 말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다. 오직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시고 하나님 앞에서 소탐대실하지 마시고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열심있는 삶이 되고 만족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불만들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들을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약 5:4.7.9).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들까지를 참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일을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불만족스러운 일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소탐대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셔서,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기쁨을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Jun 22, 2025

하나님의 전을 채우는 신앙
(느헤미야 11:1-2)
주원영담임목사
느헤미야서는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을 재건한 직후의 일들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런데 11장에 기록된 말씀의 시작이 조금 이상합니다.
1절 에 ◎ “거주하였고. 거주하게 하고. 거주하게 하였으며.” 이 표현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번역이 조금 아쉽습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자리를 잡았다. 정착했다”는 의미입니다. “지도자들도 오랫동안 거주하게 하였고. 백성들도 그곳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이런 의미입니다. “너희들 여기 살아라” 하면서 억지로 주저앉혔다는 뜻입니다.
또한 1절에는 ◎“제비 뽑아.” 이런 말도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없어서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뽑힌 사람은 마지못해 예루살렘에 주저앉았습니다.
이어지는 2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 (느 11:2). 이 말씀 때문입니다. “너희들 참 안됐다. 그곳에서 살겠다고 하니 잘 살아 봐라. 하나님께서 복 주시길 바란다.” 이런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모습들을 설명한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는 많은 어려움들을 겪으면서 백성들과 함께 폐허가 된 성을 새롭고 멋있게 리모델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느헤미야는 왜 사람들이 거주하기를 싫어하는 예루살렘을 그렇게 힘들여서 재건했을까?
예루살렘은 그 옛날 멜기세덱이 살렘 왕으로 통치했습니다(창 14:18).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창 22:2. 대하 3:1). 다윗은 그곳을 수도로 정하고, “예루살렘(평강의 기초)”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전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도라는 의미를 넘어서 “성전이 있는 곳. 예배를 드리는 곳. 순례하는 곳. 하나님을 만나는 곳.” 이런 의미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종교적 특성이 강한 곳으로 점점 변해가자 ◎자연히 생활의 규제와 지켜야 할 법규가 많아지고 엄격해졌습니다. ◎게다가 절기 때가 되면 이곳저곳에 살고 있던 친척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일주일에서 길게는 50일까지도 머물렀기에 숙소는 말할 것도 없이 식수마저도 모자랐고, 특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지켜야 할 법규가 너무도 많아 상권도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수도였지만, 중요한 장소였지만, 주거지로서 메리트가 전혀 없었습니다.
바로 그 예루살렘이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서 함락되자 그곳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미련 없이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심지어 성전을 지켜야 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까지 다 그 성을 떠났습니다. 그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유다 모든 성읍에 흩어져 각각 자기 기업에 살았고(느 11:20). 예루살렘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이, 사람들의 기억속 에서 점점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절기도, 예배도, 기도도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자신들의 정체성도 잊혀져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만 텅 빈 것이 아니라, 저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믿음도. 열정도”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 성을 느헤미야가 재건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단순히 한 나라의 수도를 재건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담겨져 있는 “정신과 신앙과 정체성을 재건한 것”입니다. “무너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텅 빈 믿음을 다시 채우고 회복하려고 예루살렘 성읍 재건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또한 그곳에 억지로 사람들을 머물게 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느헤미야는 먼저 ◉백성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거주하도록 권면합니다(느 11:1). 그리고 ◉제비를 뽑아 백성의 십 분의 일은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합니다(느 11:1). 좀 싫지만, 불편하지만, 마음에 안 들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많지만, 그곳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최선을 다하여 권면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자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느 11:2).
오늘 창립 1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이 말씀을 눈여겨보고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비워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외곽의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지려고 하지 말고, 사람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런 사람들로 예루살렘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3절 말씀에도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이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교회로 말씀드리면, 장로님과 안수집사님 권사님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제비 뽑힌 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이곳저곳을 섬기도록 임명된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분들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순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자원하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자원하는 것입니다. 정성으로 내가 채워야 할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몸이 멀어지면, 자연히 마음도 열정도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횟수가 줄어들면, 교회에 대한 관심도 헌신도 사모하는 마음도 줄어듭니다. 내가 예루살렘인 성전을 비우면, 내 안에 믿음도 사명도 열정도 점점 비워집니다.
그러나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성전을 채우면, 내 안에 믿음과 사명과 열정도 점점 채워집니다. 나의 삶이 귀한 하나님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영적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느헤미야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저들은 예루살렘에서, 초라하지만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을 성경은 무려 7대 손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대 손이며(4절) 칠대 손이라(5절). 다 용사였느니라(6절).” “칠대 손이며(7절) 성읍을 다스렸느니라(9절).” “오대 손이며(11절) 육대 손이며(12절) 현손이며(13절). 그들의 감독이 되었느니라(14절).” “현손이며(15절).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17절).” “그들의 책임자가 되었느니라(21절).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하나님이 전 일을 맡아 다스렸으니(22절).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렸느니라(24절).” 대대로 축복의 가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최후의 승리를 얻는 자요, 영적 성벽을 쌓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런 자들과 같이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전을 채우시는 성도님들 되셔서 자손 대대로 축복의 가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un 15, 2025

금보다 더 귀한 믿음
(여호수아 1:1-9)
주원영담임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라암셋(고센)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와 마라와 엘림을 거쳐 르비딤 골짜기를 지나서 시내 산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을 떠나 가데스바네아와 에돔 등을 거쳐서 사해바다 옆에 있는 모압 지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힘든 여행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렇게 어렵고 힘든 많은 환경들을 모두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 땅에서 가나안 땅까지 가는 길이 아무리 길고 험난했다고 하더라도, 40년씩이나 걸릴 그렇게 멀고 긴 여정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19:1절 말씀을 보면, 고센 땅에서 시내 산까지 약 50-6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0:11-12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근처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약 1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37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서 머물렀다는 말입니까?
민수기 21:11절 말씀과 21:20절 말씀을 보시면, 저들은 광야 40년의 대부분의 시간을 모압 지방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민수기 22:1절 말씀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에서 거처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요단강 바로 앞, 여리고 성이 눈앞에 보이는 그 장소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여정을 풀고 집을 짓고, 축사를 짓고, 농사를 짓고, 결혼을 하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지낸 광야의 여정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머문 “시내 산”은 하나님은 만나는 장소이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압”이라는 곳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압이라고 비유된 그곳이 어디입니까? 어떤 곳이기에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까?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에 머물게 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모세가 죽었기 때문입니다(수 1:1-2).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는데 내려오지 않으니까, 백성들이 아론에게 간청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거기에 경배했습니다. 이 말은, 저들이 모세를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모습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가 손을 내미니 홍해가 갈라졌고, 바위를 치니 바위에서 물이 솟아났고, 손을 들고 기도하니 철병거로 무장한 아말렉을 이기는 기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갑자기 죽었습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연자실한 것입니다. 신명기 34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처럼 대단했던 모세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흔적도 남기지 않게 하시고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보이는 모세를 더 이상 바라보지 말고, 보이지는 않지만 너희를 여기까지 인도한 전능하신 너희의 하나님인 나를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세 대신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귀한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히 13:8. 계 1:8). 항상 영원한 현재이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금보다 더 귀한 이 믿음을, 언제 어떤 사람에게 주십니까?
◉내가 붙잡은 것을 놓을 때 선물로 주십니다(수 1:1).
여호수아서를 살펴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하나님 품에 안겼는데(수 24:29),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아마도 80세가 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기록을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지내왔지만(출 33:11).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께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늘 회막에 엎드려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는데, 80년이 지나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여호수아 1:1절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보이는 모세도 함께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보이는 것을 함께 의지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아니 나타날 수가 없는 환경을 여호수아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붙잡을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붙잡기 시작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의지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 손에서 놓았을 때, 내 신앙이 그런 모습일 때, 그때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말씀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가르칠 때 선물로 주십니다(수 1:7-8).
믿음은 말씀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집니다.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유언했습니다(신 6:4-9).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 가르쳐야 합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나의 모세를 놓을 때, 그때 그 믿음의 선물이 나에게 주어집니다. 말씀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나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소원한 것들이 다 이루어집니다.
이 은혜가 삶의 현장에 풍성하게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un 8, 2025

주님의 마지막 담판
(요한복음 21:15-17)
주원영담임목사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요 21:15). 식사를 하신 후에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담판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셨고, 또 여러차례 담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빌라도와의 담판에서 예수님께서 지셨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눅 23:23). 결국 이 담판에서 지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담판에서 져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지금 제자들은 있는 저 북쪽 갈릴리에 새벽 미명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이 가득찬 음성으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 이렇게 물으십니다. 저들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 주시려는 주님의 간절한 음성이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위하여 숯불을 피워 놓으셨고 떡을 준비하셨고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손으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드디어 아침식사가 끝나자 담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목하시면, 주님께서 아주 특이한 호칭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호칭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요 21:15.16.17).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시지 않으셨던 호칭입니다. 왜 마지막 시간에 사용하신 것일까요?
지금 담판을 하려는 상황이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예의를 표시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존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빌라도의 법정 안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보았음에도 다른 제자들을 이끌고 3년 전까지 생활의 터전이 있었던 저 북쪽 갈릴리로 돌아가서 뱃일을 시작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내려보지 않으시고 존중하는 태도로 담판에 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렇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주님께서는 아가페로 물으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두 번째 질문과 대답도 똑 같았습니다(요 21:16). 주님께서 세 번째 물으십니다(요 21:17). 그런데 이번에는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귀한 두 가지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➊아가페(αγαπη)이신 그분이, 아가페를 포기하십니다. 필레오 밖에 모르는 베드로를 야단치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주님의 수준은 아가페였지만, 그 수준을 포기하시고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❷부족한 인생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베드로를 향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시면서 존중해 주시는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세 번씩이나 똑 같은 대답을 했지만, 세 번째 대답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큰 변화가 보여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 21:17).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이 대답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드리는 대답입니다.
아가페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담판 앞에서 두 번씩이나 당당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베드로의 수준인 필레오로 내려오시니까, 그의 당당함은 무너지고 오히려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비탄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상대를 높여주는 것, 상대의 입장으로 내려오는 것,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결국 이것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섬김의 삶을 살아오신 주님께서 지금 베드로를 높여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이해하여 주십니다. 일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하신 자신이 하신 말씀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삶은 삶이고.”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이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부활하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내 삶에 개입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계산으로는 손해보는 것 같고 지는 것 같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만 하시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그 사건 속에 나타납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 상황에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항상 높은 곳에서 상대를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상대가 약점을 드러낼 때는 하대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관계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에게는 주님의 은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나의 수준에 맞추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의 수준에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아가페(αγαπη)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허물과 못남과 부족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여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가페(αγαπη)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면, 그 현장에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건을 변화시켜 주시고, 사람을 변화시켜 주시고,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저와 성도들 모두에게 넘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