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약
Feb 28, 2026

성도의 삶. "감사"
(민수기 11:1-9)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보고 사느냐?” 이 모습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서 감사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매사에 불평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광야를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들은 모두 감사해야 할 일들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불평하고 있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하지만 이와 같은 불평과 원망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다른 인종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른 인종인데 이스라엘과 섞여 사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들의 영향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면서 불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이 다른 인종들(출 12:38-수많은 잡족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행진이 점점 불편해지자 그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따라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다를까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주님이 아닌 세상에서 배우는 것은 아니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진노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으로 본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민 11:1).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진노하심이 임한 것입니다. 천막도 옷가지도 다 불타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불이 꺼졌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에, 저들은 그곳을 다베라(다 타버렸다)라고 불렀습니다(민 11:2-3). 제발 정신 차리라는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의 늪에 빠진 원인이 무엇입니까?
◉지난날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과거의 은혜).
노예 된 그들을 건져주시고 자유를 주신 그 은혜 말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군대가 쫒아오는 그와 같은 환경에서 구해주신 그 은혜 말입니다. 마실 수가 없는 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시면서 삶을 인도해 주신 그 은혜 말입니다. 그 은혜를 망각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지금도 베풀어 주시는 축복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현재의 은혜).
아직도 광야를 걸어가고 있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좋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한 것입니다(민 11:4-6). 결국 축복을 축복으로 알지 못하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하여 사라지고 마는 불타는 모습뿐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앞으로 베풀어 주실 미래의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소간 불편하고 다소간 고통스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저들의 발걸음은 약속의 땅이고 축복의 땅인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가나안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으면 가나안으로 갈 수 없다는 평범한 상식을 망각하고, 너무나도 쉽게 가나안의 꿈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현재의 축복을 망각하고 미래의 희망을 상실한 저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입니까?
본문이 말하는 대답은 간단합니다. ◉과거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축복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면서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참고. 딤전 6:8).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민 11:6). 핑계입니다. 8절을 보시면 만나가 얼마나 좋은 식품인가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민 11:8). 그리고 9절 말씀을 보니, 그 만나가 그 밤에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중단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면서 만나와 함께 감사의 마음도 거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가지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불태우져서 잃어버리고 나서야 감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불평은 불평을 낳습니다. 그렇기에 불평을 희망과 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이 있으시다면, 그 원망과 불평을 소망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꿈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님들 모두가, 이 기적과 같은 축복을 맛보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살아가면서 불평하고 원망할 일들이 많더라도, 불평과 원망을 뒤로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약속의 땅을 행하여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Feb 21, 2026

성도의 삶. "주인은 오직 한 분" (마태복음 6:19-24)
주원영담임목사
마태복음 6장에는 ◎종교적 위선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은밀히 행하여야 하는 성도의 덕목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구제:1-8절. 기도:5-15절. 금식:16-18절. )에 대하여. 기도에 대하여(9-15절). ◎이어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재물과 의식주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재물에 대하여:19-24절. 의식주 문제에 대하여:25-32절). 그리고 성도들은 이런 것들보다 먼저 구하여야 할 것에 있다고 교훈하셨습니다(33-34절).
그중에서 먼저 재물에 대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19-24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무엇을 금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너희를 위하여” 입니다.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재물을 쌓아 놓는 것을 금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탐욕적인 마음으로 재물을 모으는 모습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성도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신 것으로 주의 일을 위하여 사용하면 된다. 많이 주시면 큰 일을 하고, 적게 주시면 그것으로 주의 일을 하면 된다.” 어느 정도의 물질이면 많은 것입니까? 어느 정도의 물질이면 적은 것입니까? 성경에 그 기준이 있나요?
오늘의 말씀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대한 기준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재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재물을 통하여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19-24절 )은 우리에게 2가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을 쌓아도, 그 물질이 우리의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19절).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좀과 동록이 해하며.” 이 땅의 재물은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좋은 살충제가 있고 철저한 보안장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큰 위험이 다가오고 가진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고 경험합니다. 그래서 지혜자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두 번째 교훈은 ◉필요가 욕심으로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21절).
물질은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기에 부지런히 노력해서 남아있는 삶을 준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에도 예수님께서 물질을 모으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필요하다는 것이 어느날 욕심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물질은 필요를 위해서 쓸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을 구별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이 물질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물질이 나를 지켜줄 것 같기에 보물처럼 귀하게 모읍니다. 사용하지 못합니다. 물질이 보물이 되고 물질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니까, 내 마음도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을 숭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을 발견하는 순간 영원하지 않은 모든 것이 하찮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포기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나는 물질의 주인이 아닌 관리인의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손에 웅켜쥐고 있다고 그것들이 모두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소유는 “내가 사용할 때”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쓸 때” 내 것이 된다는 것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누가 주인인가를 생각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24절 말씀이 우리의 결단을 도와주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 전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 모두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우선순위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고, 사람은 “나눔의 대상”이고, 물질은 “사용의 대상”이다. 마음이 깊이 새기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심으로,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영육간의 모든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시는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Feb 14, 2026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편 57:1)
주원영담임목사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의 근원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찾아오셔서 나와 내 가정과 내 삶의 현장에, 특별히 우리들 가정에 선물로 주신 자녀들에게, 놀라운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니라 (마 10:12-13). 그러므로 우리가 복을 빌어주는 것은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닙니다. 이웃을 향하여 복을 빌어주면, 그 사람도 잘되고 나도 잘 됩니다. 믿으시고, 내 옆에 계신 분들에게 복을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더 어렵고 힘듭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렇게 힘든 일들을 헤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민족명절인 설날 연휴가 시작하는 주일. 이와 같은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 57편을 펼쳤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을 때에.”
성경은 그곳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삼상 24:1). 사울 왕이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가던 일을 멈추고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안다고 고자질을 합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즉시 다윗을 잡으려고 떠납니다(삼상 24:2).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사울은 다윗이 숨어있을 것으로 생각된 동굴을 발견합니다(삼상 24:3). 그런데 바로 그 굴 깊은 곳에 다윗과 그의 일행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터널이 아닙니다, 굴입니다. 그곳 깊은 곳에 다윗이 숨을 죽이고 숨어있습니다.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숨어있던 다윗이 밤을 새워가며 기도합니다. 소리내어 기도합니다(시 142:1.5-6). 지금 원수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원수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상황을 피할 길이 바로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계속해서 깊이 묵상할 때,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그곳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시편 57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57:1). 반복적으로 기록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기도드리는 자의 모습입니다.
다윗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시편과 사무엘서를 보시면, 다윗의 입에서는 언제나 은혜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살아가시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한 종은 세상의 모든 단어 중에서 “은혜”라는 단어가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규정짓는 가장 귀한 단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사모하면 은혜를 입습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리면 은혜를 입습니다.
모압 여인 룻을 보세요. 이방 여인입니다. 룻의 삶은 어떤 희망도 꿈을 꿀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외서는 은혜라는 단어를 계속 말합니다(룻 2:2.10.13). 그 결과 지주였고 유력한자였던 보아스가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후손에서 다윗이 탄생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믿음의 명문가가 되었으며 구속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은혜였습니다.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면서 은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붙잡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은혜라는 단어에는 이런 의미들이 있습니다. 긍휼하심입니다, 자비하심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그리고 받을 수 없는 자가 분에 넘치게 받는 은혜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이렇게 크고 깊고 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자비함을 더하여 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다윗은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느냐?” 이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들은, 무의식 중에 생명력을 가지고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잠언 18:21절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 18:21). 민수기 14:28절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 14: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환경에 계십니까? 캄캄한 굴속 같습니까?
그렇더라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하나님이여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나아갈 때에,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이 캄캄한 굴속일지라도 우리를 건져주시고 지켜주시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사야 43:2절 말씀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 43:1-2).
이 말씀을 붙잡고, 다윗이 만난 그분 하나님을 만나시는,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그 은혜를 맛보시는 은혜와 축복이 성도님들의 삶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Feb 7, 2026

먼저 가야 할 곳, 브엘세바.
(창세기 46:1-4)
주원영담임목사
성도님들께서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담대하게 순종하면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으십니까?
어느 날 야곱은,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다녀온 아들들을 통하여, 사랑했지만 죽었다고 알고 있던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 말입니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야곱은 확신을 가지고 죽기 전에 아들 요셉을 보겠다고 말합니다(창 45:28). 가산(家産)을 다 정리합니다. 70여 명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130세의 나이에, 그 먼 곳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는 결정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결정입니다. 그런데 결정합니다. 아들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믿음의 사람 야곱의 발자취를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유는,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길을 떠났지만, 야곱은 곧바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브엘세바에 먼저 들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창 46:1)
분명한 것은 브엘세바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지 않았습니다. 브엘세바는 광야에 있는 동네였습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의 몸종 하갈이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났던 곳입니다(창 21:14.16).
그런데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다가 브엘세바를 찾습니다. 그곳에서 양식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브엘세바로 가족들과 소유물을 모두 이끌고 나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이 온 가족을 이끌고 왜 브엘세바를 먼저 찾았다는 말씀 속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창 46:1). “이르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먼저 그곳에.”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향하여 일부러 나아갔다는 말씀입니다. 브엘세바를 들르는 것을, 아들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데,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과는 방향도 다른 곳인데, 야곱이 왜 이곳을 먼저 찾았을까요?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에 응답을 받은 곳입니다(창 21:33).
아브라함과 사라의 평생의 제일 간절한 소원은 아들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쫒아냅니다. 바로 그곳이 브엘세바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장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에 에셀나무를 심었고, 그곳에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기도가 있었고,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고, 아비멜렉과 언약이 있었던 그곳이 브엘세바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이삭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입니다(창 26:23-25).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넓고 복된 장소인 르호봇에 이삿짐을 푼 그날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밤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브엘세바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야곱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 옛날, 형 에서에게서 팟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후에 도망쳐야 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먼저 찾았던 곳이 브엘세바였습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기도의 응답을 받은 곳이고,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그래서 도망해야 하는 급한 상황임에도 그곳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바로 그곳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야곱을 만나주셨고, 야곱의 가는 길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잊지 못할 경험을 한 장소가 바로 브엘세바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엘세바는 단순히 브엘세바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기도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입니다.
지금 야곱은 대단히 중요한 인생의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과연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 길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지를 묻기 위하여 자기 생각과 계획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먼저 브엘세바를 찾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앞에 놓고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삼하 2:1).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 성 전투 때, 기브온 거민들을 만났을 때.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고난의 시간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곱은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길을 물었습니다(창 46:1). 짐승만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길을 물었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6:2-4).
성도 여러분. 애굽은 우리의 원하는 목표이고 꿈이고 희망일 수 있습니다. 의식주가 해결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곳 애굽보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위하여 자신의 언약의 맹세의 축복을 이루어 주셨던 특별한 장소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곳,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브엘세바를 찾기만 하면, 하나님의 전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십니다. 말씀하십니다. 만나주십니다.
우리들은 매일 똑같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하루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냥 적당히 세월이라는 돛단배에 몸을 싣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의미 있는 날들을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시간이 되고, 이 시간에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